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김창희(1973)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해태 시절 == [[파일:김창희 해태.PNG|350픽셀]] 1997년 2차 1순위로 뽑혔다. 롯데의 연고인 마산고 출신이였으나 롯데가 외면하여 해태가 데려갔다. 당시 재정난의 해태가 뽑기엔 최상위급 대졸 선수였다.<ref>계약금은 1억 6천 5백만원</ref> 대학 3, 4학년 때 사이클링 히트를 2 번이나 친 선수였고 그 해 고졸 우선 지명에서 뽑은 [[김병현]], 김준희, 김원 외 2차 지명에서의 3명마저 포기했던 해태로선 기대하던 선수였다. 첫 해인 97년부터 바로 로스터에 들어갔지만 간간이 대타로 나왔다. 주장이였던 [[이순철]]의 오른쪽 손가락 부상으로 6월 초부터 주전으로 뛰었는데 6월~7월 초 동안 3할에 홈런 5개, 장타율이 이종범을 이은 2위를 찍는 등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성적을 바탕으로 8월까지 LG의 신국환<ref>3년 차였지만 데뷔 후 5년 안에 60타석 이하 출장했기에 신인왕 자격이 있었다. 박종호의 발목부상으로 인해 2루수 주전으로 낙점, 좋은 성적을 보였다.</ref> 과 함께 신인왕을 노리는 다크호스로 떴으나 0.305 69타점 23도루의 이병규를 이기기엔 무리였다.<ref> 11승 7패 3.52의 임선동은 8월 초까지 저 세명이 달리던 신인왕 레이스에 끼지도 못했다.</ref> 6월 18일의 자신의 3호 홈런을 친 날은 삼성과의 경기였는데 당시 대구구장 한경기 최대 홈런인 11개의 홈런이 나왔으며 이 날 모든 경기를 합쳐 홈런이 22개나 나왔다... 이날 엠창용은 양가한테 투런쳐맞고 블론을 저질렀고 결국 13:13 개막장 무승부가 나왔다. 갓끼리사마께서 개빡치시어 엠창용에게 죽빵을 작렬하셨다. 한국시리즈 로스터에 이순철이 빠지고 김창희가 있자 어떻게 이순철을 빼냐고 해태팬들이 노발대발했으나 해태가 지고있던 4차전, [[홍현우]]가 동점 홈런을 치고 김창희가 상대 선발 김용수에게 역전 홈런을 까며 해태의 V9에 일조한다. 1997년 성적은 0.263 43타점 9홈런. 1998년엔 수비 포지션을 우익수에서 중견수로 바꿨다. 이는 작년에 중견수를 봤던 이순철이 0.213라는 형편없는 성적으로 방출되었고<ref>98년 삼성이 주워가서 쓴다.</ref> 빨랫줄 송구로 주자를 잡는 등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8월 21일, 해태의 7연패 때 0-1로 끌려갈 때 역전을 성공시켜 연패를 끊었었기도 했다. 국내 프로야구 최초로 250번 째 선발 등판을 한 경기에서 상대 선발인 [[이상목]]에게 홈런을 치며 결승점을 만들어내 [[이강철]]의 통산 130번 째 승을 챙겨주었다.<ref>이 전 날에도 홈런을 쏴서 두 경기 연속으로 홈런을 친 경기였다.</ref> 0.267, 12홈런 64타점으로 괜찮은 성적을 냈다. 이후 성적은 점점 떨어졌으며 해태는 KIA에게 시즌 중간에 인수된다. 많은 사람들이 해태의 마지막 홈런타자는 [[장성호]]로 알고 있으나 김창희가 해태의 마지막 홈런을 친 선수이다.<ref>그 외에 이동수도 홈런을 쳤다. 경기는 8-6으로 졌으며, 승리투수는 노장진이였다. 사족으로 이날 두산의 선발투수는 조계현...</ref>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