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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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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피한 자연재난일 뿐이었다? == 혹자(급식충 국뽕들)는 경신대기근이 1600년대 후반, 기후변화로 인한 전세계적 환경 피해이며 따라서 조선이 당한 재난이 불가피한 점이 없었다고 항변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은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통치 하에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옆나라 일본의 농부들은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도시 상인을 단단히 옭아매던 세금과 동업 조합이 자유로워지고 농민에 대한 대우가 좋아져 농업 생산량이 급증했고 상업 또한 활발하여 이미 조선의 국력을 수배 앞서는 상황이었으며 이에 따라, 왜구들이 급감하게 되었다. 물론 같은 농촌이더라도 지역 간 편차는 있었다. 또한 위정자들은 수세기에 걸쳐온 연합 파벌 정치, 노론과 남인 간의 무의미한 예송논쟁 등 정권 욕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백성의 생활 안정과 대기근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은커녕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신대기근은 조선에서 발생한 벼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 방식이 수전방식의 벼농사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기적 대규모 아사 사건이며 위정자들의 무능력한 통치에 따른 '조선 특유의 인명 경시, 백성의 삶은 관심이 없는 위정자들의 통치' 등의 이유로 발생한 인재(人災)의 문제이지, 지구촌 기후 변화에 따른 전세계적 자연 재해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 자연 재해다 === 사실 냉해 + 가뭄 + 홍수 + 우박 + 병충해 + 그 외 여러 자연 재해가 섞여있는 이 총체적 난국에선 무능한 놈이든 유능한 놈이든지 똑같이 말아먹게 될 거다. 문제 이 당시 전국 8도 대기근으로 인해 농산물 감소가 심했다. 구휼책 또한 식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구휼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쌓은 재정이 거의 없고 청나라로부터 쌀 수입 하는 것도 체면 차리느라 반대하여 사태를 키운 감이 없진 않지만 이 기근 동안에는 정확히 현종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봐야 한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사이에 껴있어서, 그리고 또한 환국의 시발점이라는 점과 밑에 기록에 3번 정도 나온 것처럼 조정 상태가 정상인 건 아니었지만 자연 재해 스케일이 꽤 커서 현종 때 조정이 경신대기근에 한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보여지는 중. 요약하면 세종대왕이었다면 무리 없이 해결했을 기근을 해결 못 했으면 가루가 될 때까지 까여야 하겠지만 이 정도 기근은 세종대왕이더라도 해결하는데 피눈물을 흘릴 정도이므로 현종은 당연히 수습 불가. 요런 식이다. === 급식충 국뽕들이 하는 전형적 평가에 대한 반박 Ⅱ === 경신대기근은 조선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재해를 확대한 부분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책 없는 이앙법으로의 전환이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저수지, 보 등의 수리 시설은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1인당 토지 면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가뭄, 자연재해 피해는 클지 모르나 노동력이 절감될 수 있는 이앙법은 지주 및 농민 입장에서도 꽤 매력적이었고 지주 층이 많고 1인당 토지면적이 넓은 삼남 지방에서 이러한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를 반증 하듯이, 경신대기근 때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삼남 지방이었으며 직파법과 밭농사 위주였던 경기 북부 지방, 함경 평안도 지방은 그렇게 치명적인 피해가 없었다. ㄴ 요동도 기근이 돌았다는데 왜 함경, 평안도는 피해가 없냐? 냉해나, 가뭄은 흔한 기후 현상이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수도 없이 발생했다. 만약 이 시대에 직파법이 유지되었거나, 이앙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수리 시설, 농민들의 자가 노력 (대기근 이후, 농민들은 두레 및 품앗이 등의 노동력 관리법, 민간 비용의 보 건설 등 각 향촌 단위별로 조직) 혹은 묻지마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17세기에 유행을 타지 않았다면 경신대기근이 이렇게 큰 피해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농민은 벼 경종법으로 이앙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이앙법이 풍속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갑자기 금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고 수리 시설도 없이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논에 물 대기 농법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는 와중에 재해를 만나 더더욱 망하게 된 것이다. 즉, 요약하면 저수지와 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들의 한탕주의식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유행을 타고 있었고, 그것이 재해를 부풀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벙찐 대응까지 겹쳐서 대량 아사와 같은 화를 더 불러온 것이다. ㄴ 그말대로면 보리철에는 기근이 없어야지 미친놈아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타령하는 국뽕충이 또 보이는데 시발, 세종대왕이 현종 때 살았으면 애초에 저수지 지어서 가뭄, 홍수에 좆털리지 않았거나 구휼미는 잘 풀어서 굶기지는 않았겠지. 이 사건 이후로 현종은 바로 '제언사'라는 저수지, 보 관리 관청을 신청하고 국가적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을 쓰면 농사에는 편하지만 모내기 철에 가뭄을 만나면 크게 실농하므로 국가에서 권장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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