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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여조 == ==== 초여조 ==== {{문무겸비}} {{사이다}} 이가와 더불어 베트남 역사상 손꼽히는 가장 강력한 왕조 중 하나. 북속시기를 영원히 끝내고 최초로 베트남의 역사를 기록한 대월사기전서가 나온 왕조이다. 태조 여리는 독립전쟁을 마친 후 초여가를 창건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오른팔 완채를 조정의 초대 승상으로 삼고 토지대장과 호적의 재정비 및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균전제를 실시하고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태조는 명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남은 제국의 갖가지 후유증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다.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태종은 아버지가 완수하지 못한 뒷수습을 마무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태종 역시 아버지 못지 않게 훌륭한 명군이었지만 승상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된 완채의 거처를 방문하다 의문사한다. 완채와 그의 삼족들은 태종을 암살했다는 모함을 받고 참형에 처해진다. 명군 두명이 연달아 급사한 제국은 태종의 삼남 인종을 제위에 올려놓고 그의 생모 선자태후를 섭정으로 삼아 간신히 안정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 여의민이 일으킨 모반으로 인종은 선자태후와 함께 살해당한다. 대국적이지 못한 여의민도 불과 1년만에 청화 지역 출신 공신들에게 살해당하고 제위계승권에서 거의 꼴찌나 다름없었던 황자가 제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성종은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치적들을 남겼다. 먼저 황자 시절 승룡에서 짜져있으면서 갈고 닦았던 유학을 정치에 구현하며 청화 지역 공신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나대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반면 베트남 역사상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한다. 그리고 행정을 개편해서 전국을 13개의 도로 나눠 지방관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또한 평등하고 자애로운 법률들이 담긴 흥덕률을 반포해서 남녀와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가 공평하고 덜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오사련 같은 사가들을 등용해서 대월사기전서를 반포해 베트남 역사를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국외로도 제국을 노리는 점성과 란쌍 왕국 등의 이웃나라들을 침공하고 이 두나라의 수도까지 따먹기도 했다. 그렇게 성종조 시기의 제국은 인도차이나의 강대국으로 번창하다가 성종이 죽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후임 황제들이 줄줄이 요절하고 청화 지역의 개국공신 세력과 성종의 비호를 받던 홍하 델타 지역 세력들의 병림픽, 정유산과 완홍유 등의 무신세력 난립, 각 지방의 반란 등으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은 무천후 막등용에게 모든 병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막등용은 병권을 잡자 권신이 되어 황제들을 멋대로 갈아치우고 허수아비 황제들을 옹립했다. 나중에는 지가 직접 제위를 찬탈해 초여가를 멸망시키고 막가를 창건한다. ==== 남북조 ==== {{콩가루}} 남쪽의 여가는 완홍유의 아들 완감을 중심으로 복려운동이 일어났고 북쪽의 막가는 태조 막등용과 태종 막등영 부자의 선군정치로 지네끼리 잘 살고 있었다. 완감은 여녕을 장종으로 즉위시켜 여가를 재건한 후 명나라를 끌어들여 막가를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막등용 본인이 스스로를 결박하고 명나라군 앞에서 자길 죄인이라 칭하며 광서와 맞닿은 5개 동을 할양해서 실패한다. 막등용에게 실망한 민심은 완감으로 돌아가고 완감은 기세를 이어 승룡까지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막등용의 휘하 장수 양집일의 거짓 투항에 속아 살해당한다. 완감이 쥐고 있던 모든 병권은 사위인 정검이 가져갔다. 그렇게 남쪽에서 정씨일가와 완씨일가의 보좌를 받는 여가와 북쪽을 거점으로 삼는 막가의 여막내전이 지속되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여가가 막가를 멸망시키면서 남북조시대는 끝난다. ==== [[정완분쟁]] ==== {{콩가루}} 막가를 멸망시킨 정씨일가와 완씨일가는 여가 황족들을 황제로 섬기고 자신들은 각자 땅에서 정주와 완주라는 무신정권을 세우며 제후 노릇을 했다. 그런데 정주에서 정장이 정왕으로 즉위하고 완주에서 완복원이 완왕으로 즉위하자 이번에는 정완분쟁이 일어났다. 정주는 완주를 복속시키러 침공군을 보냈지만 개털렸고 전쟁은 결판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양쪽 정권들의 백성들의 삶은 전쟁을 위해 병역 및 세금의 부담으로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정주는 계속 군사를 보내서 완주를 침공해 위협을 일삼았고 완주는 정주보다 딸리는 국력을 보충하기 위해 점성과 진랍을 약탈했다. 여기서 완주의 무장 완유경의 남진 정책으로 동내와 가정을 확보하게 되고 오늘날의 베트남땅이 완성된다. 하지만 완주 내부에서 곪아있던 민생문제와 관리들의 부패는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서산 지역의 어느 깡촌에서 완악, 완려, 완혜 삼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3형제는 장복만 등의 간신배에 휘둘리는 완주 조정에 분노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완주 조정을 전복시킨다. 서산삼걸 형제들이 일으킨 서산기의로 장복만은 축출되고 완주 왕족들의 일가친척 대부분은 서산군대에게 사로잡혀 참형에 처해진다. 살아남은 마지막 완왕 완복영은 시암 왕국으로 망명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라마 1세는 2만의 대군을 보내 서산군대를 치게 했지만 완혜의 매복 작전으로 미추강에서 대패한다. 완주를 몰아낸 완혜는 복려멸정의 기치를 내세우고 북진을 거듭해 정주마저 멸망시킨다. 이로서 오랜 정완분쟁은 서산군대에게 종결난다. 여담으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방 세력이 본격적으로 베트남과 접촉한 시대다. 자국어(쯔꾸옥응으)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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