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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군에서 의경 생활한 아버지의 경험담 == {{눈물}} {{일기장}} {{고전유물}} 기독성 흐려도 이해해 줘라. 아버지는 1988년 2월부터 1990년 8월까지 전남 신안군 흑산도 쪽의 한 작은 섬에서 의경으로 근무했다. 알다시피 의경은 복무 희망지를 물은 후 1지망에 되도록 배정해준다. 쌍도국 사람인 아버지는 1지망 서울, 2지망 경북 등등을 썼으나 높으신 분들의 뇌물로 순차가 점점 밀려 결국 전남으로 발령받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뇌물 준 높으신 분들은 깜빵에 가겠지만 당시엔 누구나 돈만 있으면 신교대 대대장한테 뇌물 하나씩 주면 우선순위로 자대배치 해 줬다고 한다. ㄴ 마치 그거 같다. 학사장교 자대배치 직전인데 0지망 사관학교 및 보병학교 등 교육기관, 1지망 52사단, 2지망 지방 동원사단, 3지망 전방, 4지망 특전사, 5지망 특공여단 이런 식이다. 단기복무장교로서는 동원사단이 제일 좋고 특공여단이 제일 나쁘다. 아무튼 결국 쌍도국민인 아버지가 홍어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상당히 빡쳤다고 한다. 아는 사람도 없고, 지역상 불과 8년 전에 5.18이 일어난 곳이기도 해서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5.18 전후로 해서 전남/광주경찰, 특히 의경/전경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홍어국 중에서도 나주, 여수 같은 곳에 배치받으면 그나마 좋을텐데 생판 처음 들어보는 '신안군' 이란 곳에 발령받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당시엔 정보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염전노예, 머슴 이런게 아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래도 간부가 순경 1명만 있는 것과 혼자 근무한단 사실에 '구타를 안 받으니 좋을수도 있겠다.' 란 생각을 하며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근무한 섬은 사람 200명 남짓이 사는 곳으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가 1곳 있고 염전, 김 양식장 등등이 있는 어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오자 60쯤 되보이는 마을 이장이 와서 환영했다고 한다. 곧이어 주민들 100여명이 달려와 선물을 주면서 환영했댄다. 주로 술, 소금 같은 걸 줬다고 한다. [[염전노예|그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진지 모른 채...]] 아버지가 지내던 곳은 섬 맨 끝쪽의 컨테이너 박스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업무는 1시간에 1번씩 서해 경비초소(혹시 위험한 어민은 없는지, 짱깨 불법어선 있는지 등등 확인하는 용도)에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본 후 이상 없으면 경찰서에 무전기로 이상 없다고 하는 존나 귀찮은 업무(당시엔 CCTV가 거의 없어서 그랬다.), 마을 주민들 도와주는 업무 등등이었다. 아버지가 이경(육군으로 치면 이병) 때 마을 순찰을 돌던 중, 하인 노릇을 하는 일꾼을 봤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상하게 여기자 옆에 있던 순경과 마을 주민이 "이 동네에선 원래 서로서로 어업과 잡일을 도우면서 산당께~" 이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식장에서 주인 대신 다른 사람이 일하는 것, 주인이 [[염전노예|다른 사람]]에게 쓸데없고 무리한 명령을 내리는 걸 보면 뭔가 아주 약간 의심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계속 "아니랑께~ 우덜은 원래 서로서로 이런 걸 돕는당께~" 라 하며 쉬쉬했다고 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군대에서 구타로 죽어도 '훈련 중 사고로 인해 죽었습니다.' 라고 하고,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학교에서도 선생이 꼴리면 한 시간 내내 한 명만 때리기도 하는 그런 상황이었기에 아버지도 이해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밤에 순찰을 도는데 어디서 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숨어서 지켜봤더니, 염전에서 나는 소리였고 누가 맞는 것 같은 소리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의문에 잠긴 채 다음날 순찰 때 지역 주민들에게 "혹시 염전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 수 있나요?" 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때까지 염전노예들과 말을 나눈 적도, 얼굴을 자세히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우덜리즘을 계속 펼치며 "아따 원래 우덜은 일꾼이 말 안 들으면 그런당께"를 시전하며 기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오며 초,중,고 때 선생한테 수만 번 맞은 것, 대학 MT에서 4학년한테 자는 데 집단구타 당한 것, 훈련소에서 조교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맞은 것 등등을 생각해보니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고 싶었다. 그렇게 2년반이 흘러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아버지에게 소금을 주며 우덜리즘을 시전하고 배웅했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염전 따위 일은 잊어버리고 생활하다가, 제대 20년이 지난 어느 날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이 터지며 갑자기 염전에서 쳐맞은 아저씨와 쓸데없는 일과 인간이 해선 안될 일을 거들어 준 하인 아저씨들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의 과대한 선물과 변명 또한 생각났다고 한다. 그 당시 사회 상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도 지금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 아버지는 염전노예 뉴스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의경 때 본 섬 주민들이 염전노예 주인이었고, 그 사람들 일꾼이 염전노예였구나." 아버지는 그들에 대한 의심을 멈춘 것을 후회하시며 말했다. '''요약: 80년대 아버지가 신안에서 의경 복무 했는데 당시엔 그럴 수 있다고 여긴 주민들이 염전주랑 한패고 염전 일꾼들이 염전노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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