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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흥선대원군 실각이후 여흥민씨들이 정권을 거의 장악했는데 당연히 명성황후가 이쪽 보스였다 여흥민씨는 대대로 친러파 세력이라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를 손에 넣고 싶어했던 쪽발이들에겐 걸림돌이였다 그래서 친러파 세력을 몰아낼려고 일을 터뜨렸으니 그게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이였다 그렇게 여흥민씨가 몰락하고 경복궁도 왜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차근차근 쪽본제국의 강요로 을미개혁이 이루어진다. 이에 공포를 느낀 고종은 (당시)친러파 이완용 등에 의해 아관파천을 결정, 러시아 공사관으로 쪽본의 눈을 피해 ㅌㅌ 하는데 성공한다. 독립협회는 안그래도 지금 나라꼬라지가 병신인데 아관파천으로 더욱더 병신이 되고 체면마저 땅바닥에 널부러지자 고종보고 빨리 텨 나오라고 독촉한다. 그래서 일단 나오긴 했으나 아무래도 가오가 안살았다. 그래서 쪽팔림을 만회해 보고자 내친 김에 칭제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인두겁은 쓰고 있었는지 독립협회 등이 짜여진 각본대로 황제하라고 추대해도 욕심없는척 처음에는 물렸다가 마지못해 낼름 황제의 관을 받아썼다. 그리고 원구단을 세우고 황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연호를 광무라 했다. 참고로 대한제국을 밀어버리고 식민지 조선을 건설한 일제도 짜증났는지 내친김에 원구단도 밀어버렸다고 한다. ===광무개혁=== 연호인 광무는 한나라의 황제였던 광무제 유수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고종도 그덕에 광무제가 되었지만 그렇게 부를 경우 원조 광무제는 졸지에 고인드립을 당하게 되므로 아무도 고종을 광무제라고 안부른다. 청일전쟁 이후 3국간섭과 함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는 짧은 평화의 시대에 이것저것 좌충우돌 한 것을 광무개혁이라 부른다. 국뽕들은 일제와 친일파에 의해 뭍혀진 위대한 력사로서 광무개혁을 찬양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걍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근머의 근자도 모르는 위인이 자기혼자 막무가내 좌충우돌식으로 추진한 개혁은 걍 사기나 당하고 돈이나 깨먹고 흐지부지로 끝났다. 참고로 이때 광무개혁의 결과물로 나온게 저 아래의 대한국 국제다 ===의회설립 운동=== 독립협회와 입헌주의자들은 근대식 의회를 만들어 달라고 징징거렸고 고종도 황제하라고 해주었던 으리를 생각해서 중추원이란 것을 만들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 즉 황제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버리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황제권이 강고한 러시아나 독일식의 외형적 입헌군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외국인 고문들도 반란이 일어날거 같아서 전제군주제를 권할 정도로 대한제국은 좀 킹황짱인 나라 꼬라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고종의 의도대로 대신임명권을 고종이 가져가게 된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첫 번째 의회에서 갑신정변으로 인해 당시 력적으로 지정되어 아직 사면 복권되지 않았던 박영효와 서재필을 대신으로 임명하자는 병크를 저질렀다. 덕택에 첫판부터 대놓고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과 역적을 도로 불러들이자는 것에 빡친 고종은 도저히 못참겠다면서 중추원과 독립협회를 쌍으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회는 영영 해산되어 제헌국회가 열리는 1948년 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고종은 의회없이 헌법을 만드는데 그거시 아래의 대한국 국제로 만세를 이어가는 전제군주국을 호기롭게 선포했으나 결국 10년도 못되어 멸망하고 이후엔 쭈욱 총독과 대통령들이 집권하며 왕이나 황제 그딴거 없게 되었다. 안습 * 대한제국을 완전한 근대국가라고 부를수 없는 이유. ===몰락=== 친러로 기운 것은 좋았는데 아직 독립협회가 살아있을때는 다들 일본을 빨고 러시아는 미워했다. 아마 같은 동양놈이라 조선을 밀어주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었던듯. 정확히는 레알 일본이 한국을 자주독립국으로 지켜주겠다는 사탕발림이나 국가연합형태로 대등 합병되던가 하는걸 꿈꿨다는듯. ㄴ 당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유사한 생각이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했었다고 함 동양인들이 힘을 합쳐서 서양의 야욕을 막아내자. 하여간 3국간섭의 주범이자 겨우 청나라를 조졌더니 조선이란 다된 밥에 수저를 들이미는 러시아가 짜증난 쪽본은 러시아와 맏붙는다. 이때 고종은 러시아가 승리하는 시나리오 쪽에 배팅한것까지는 좋았으나 딱히 러시아 편을 들지는 않고 중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짜증난 쪽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은 별수없이 일본편에 붙었다. 그리고 쪽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겨버렸다. 청과 러시아를 조져버린 쪽본제국은 영국과 미국의 보증과 승인을 얻어 이제 조선 합병에 거칠게 없게 되어버렸다. ===멸망===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 쪽에 배팅하였던 고종은 독박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는 판돈인 한반도 전체를 일본에게 털리는 것이었다. 1904년 1차 한일협정으로 고문관이 파견, 화폐정리 사업을 일본이 주도한다. 이를 고문정치라 부른다. 그리고 조선상인들은 망했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쪽본제국의 보호국으로 강등당했다.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재정권도 빼았기고 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가 설치되고 사실상 외교권 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일본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초대 총감은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이를 통감정치라 부른다. 이때 레알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민중들이 실감하게되어 자결하기도 하고 의병도 일으켜 봤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GG를 쳐야하는 상황인것.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었던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 3인방을 보냈지만 실패, 그덕에 이토한테 한소리 듣는다. (이토: 폐하 한방 먹이셨네염~하지만 담부턴 쪽본제국에게 대들려면 쫌 더 잘해보세염~^오^) 그리고 그 대가로 을사오적과 이토한테 갈굼당한다.(오적: 아 어차피 황태자 폐하 적장손 아님? 걍 천황폐하한테 사죄하는 겸사겸사 내려오셈?) 그리고 그토록 전제군주로서 마지막 까지 머물고자 했던 왕좌까지 빼앗겼다. 그리고 고종은 조선왕조(의 실질적) 최후의 임금이 되었다. 1907년 정미 7조약 (2차 한일협정)에 의거 대한제국은 군대마저 해산당한다. 그리고 국방권, 외교권, 내정권까지 모조리 일본이 가져갔다. 국방이 나가리 되자, 당근 군인들은 옷을 벗어야 했고 이렇게 이들은 의병이 되었다.고종도 뒤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은밀히 도왔다지만 결국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완전히 진압당하고, 국내 무장독립투쟁론자들은 해외로 ㅌㅌ 했다. 슬슬 이 때쯤에 대한제국을 이대로 놔두는건 솔찍히 일제도 좀 너무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왜냐면 걍 껍데기만 남았거든? 고로 신중론자로서 당장 합방반대파인 이토가 제거되자 곧바로 합방하기로 일본 내각에서 곧바로 결정한다.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해 알량한 껍데기 마저도 작살내 버린 일제는 조선 통감부를 조선 총독부로 승격시켰다. 그렇게 한반도의 마지막 통일왕조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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