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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군 === 현대 프랑스군에 관한 정보는 [[프랑스군]] 항목으로 가라. 프랑스군은 2차대전 초기와 보불전쟁 때 독일에게 처발린 것 때문에 여러모로(특히 [[독빠]]들에게) 프랑스군이 역사적 호구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두 전쟁만 보고 하는 [[착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유럽의 전통적인 군사 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시대에는 프랑스 출신의 기사들이 십자군 전쟁을 휘저으며 활약하였다. 다만 프랑스 기사들은 백년전쟁 시기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제물이 되는 참극을 겪는데, 지휘 체계가 통합적이지 않은 중세 전쟁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참패로 초래된 위기는 뒤 게클랭과 [[잔 다르크]]의 캐리로 모면할 수 있었다. 잔 다르크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백년 전쟁 말기에 가서는 우세한 대포와 기마병을 앞세워 잉글랜드 장궁병을 박살내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백년 전쟁 과정에서 왕권 강화에 위협이 되는 귀족이 갈려나가자 프랑스는 국왕 중심으로 강력한 군대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16세기 들어 중기병과 화포, 스위스 용병을 앞세워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격돌하지만 파비아 전투에서 화승총을 앞세운 제국군에게 대패를 당하였다. 이는 유럽 전쟁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대사건으로, 이후 유럽의 육군 강국 타이틀은 무적의 보병 밀집 대형 [[테르시오]]를 구성한 스페인이 가져간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위그노 전쟁으로 내란에 시달린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스페인 테르시오는 전열보병이 등장하고 대포의 성능이 점차 증대되면서 시대에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스페인군은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우세한 기병대와 포병대에게 큰 타격을 입고 프랑스에게 다시금 육군 강국 타이틀을 내주게 되었다. 1643년은 루이 14세가 즉위한 해로 프랑스군 역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루이 14세는 루부아, 보방 등이 주도한 육군 혁신과 콜베르의 중상주의 경제정책으로 17세기판 쇼미더머니를 이룩,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40만의 상비군(기록에 따라서는 60만)을 보유하게 되어 전 유럽을 전율시킨다. 서부, 중부 유럽의 거의 대부분 국가가 프랑스를 막으려 연합해도 프랑스군이 더 많은 수준이다. 이때부터 루이 14세가 유럽 제패를 위해 주도한 수 차례의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유럽은 수 차례의 전쟁에 휘말리는데, 대체로 강대한 프랑스군을 유럽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저지하는 모양새였다. 해군도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돋보이지만, 루이 14세 시대 양대 해양강국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연합해서 덤벼야 박빙을 이룰 정도까지 성장했었다. 7년 전쟁의 패배로 그 위세를 잃어버릴 뻔했으나, 이후 군사 혁신을 통해 미국 독립 전쟁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승리에 기여한다. 특히 프랑스 해군은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 해군을 여러 차례 엿먹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해군은 영국에 이은 넘버 투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 개입은 오랜 전쟁으로 심화되던 프랑스의 재정난에 결정타를 날렸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군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육군의 경우 7년 전쟁기 군사 혁신을 계승하면서(정확도와 연속사격 속도가 빠른 그리보발 대포가 대표적이다) '국민군'을 탄생시킨다. 즉 혁명 정부가 주도한 국민 총동원령으로 근대적인 국민개병제(징병제)가 도입된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혁신이었던 것인데, 기존의 군대는 왕족과 귀족의 사병이나 다름 없던 집단이었기 때문에 누굴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국민군은 혁명으로 다시 세운 프랑스를 전제주의 국가로부터 지키려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소집된 군대였다. 즉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대였던 것이다. 당연히 유럽 여타 국가와 정신무장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귀족 출신 장교들이 사라져 어수선했지만, 혁명 이후 계급구조의 붕괴로 신분보다 능력이 뛰어난 장교들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근대화된 군대에 유럽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다가서게 된다. 다만 프랑스 해군은 혁명으로 인한 귀족 출신 장교의 부재를 메꾸기는 어려웠기에,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내내 별다른 활약을 못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 프랑스 육군은 '그랑다르메(대육군)'로 불리며 혁명기 군사혁신에 나폴레옹의 걸출한 지휘력이 맞물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유럽을 제패한다. 흔히 독일군한테 털리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우위를 내준 적이 거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 출신 용병'은 있어도 '독일군'이라는 개념이 이때 존재한 적조차도 없다. 30년 전쟁(1618-1648)이 프랑스와 스웨덴의 우세로 끝난 이후 체결된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프랑스의 요구로 독일은 분열되어 걸레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도 역시 독일을 탈탈 털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키고 프로이센에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안겨주는 업적도 달성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지면서 나폴레옹의 유능한 부관들이 독일 털다가 상당수 [[팡테옹]]행을 해버렸고,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을 본받아 군사 혁신을 이룩하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도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특히 러시아 정벌군을 편성하더니 역으로 지들이 시베리아의 동장군한테 정벌당한 것이 큰 타격이었다. 결국 워털루 전투를 끝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쓴 전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핀치로 몰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 프로이센군이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여 패배하고 만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유럽 여러 나라에게 군사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특히 프로이센은 '우리나라에 나폴레옹이 없으면 장교들을 최대한 많이 육성해서 물량으로 나폴레옹과 삐까치게 만들면 된다'는 일념 하에 근대적인 장교단을 육성한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그랑다르메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프랑스도 미니에 탄이나 샤스포 소총 등 군사적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전쟁 준비가 철저했던 [[프로이센]]에게 문자 그대로 참교육을 당하며 유럽의 육군 최강국 타이틀을 사실상 내려놓는다. 프랑스가 전통적인 육군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인구와 지리적 요건이 꼽힌다. 말 그대로 유럽의 중국이었다. 서유럽의 중심에 기름진 육각형의 영토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농업이 주였던 중근세에는 여기서 엄청난 인구과 경제력이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지리적 위치상 유럽의 주요 전쟁에 항상 휘말리며 전쟁 경험을 축적했다. 백년 전쟁, 이탈리아 전쟁도 패배가 많긴 했지만 인구빨로 버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프랑스 본국은 1795년까지 인도,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until 1795 metropolitan France was the most populous country of Europe, above even Russia, and the third most populous country in the world. behind only China and India. - 위키 영문판). 다만 이 육각형의 영토는 첨부터 프랑스에 떡하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근대까지 파리 근교의 일드프랑스 지방에서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프랑스 문화권이 아닌 지역들 까지(동부 게르만 문화권 지역 포함)확장되어 이루어 낸 것이다. 즉 프랑스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적 실리를 계속 챙겨오며 확장해 온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인구의 상승세는 불분명한 원인으로 저출산 경햐잉 이어지며 꺾이기 시작되었고 결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밀리며 심지어는 일본한테까지도 밀리게 된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 현상을 겪은 나라로도 알려져 있다. 독일한테 국력이 밀린 것도 결국 인구 차이로 인한 것이다. 1차대전 직전 프랑스 인구가 3900만일때 독일 인구는 6천만, 영국 인구는 4500만이었다. 현대 프랑스 정부가 저출산 해소 노력에 전력을 다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 인구는 6100만으로 영국까지는 간신히 따라잡았다. 출산률도 독일, 영국보다 높은 편이나 이는 이민자의 출산률이 높은 것도 감안하긴 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식량 자급능력을 제외한 전반적인 스탯이 독일군에 밀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강대한 활약을 하여 독일군을 패배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국력이 독일의 반토막에 불과하고, 연합국인 영국이 우물쭈물하는 상황에서도 독일의 초반 공세를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판에 현대전차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르노 FT-17]]을 개발, 페르디낭 포슈의 지휘하에 독일군에 대한 연합군의 최종 공세를 주도하였다.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을 1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독일을 다시 분열시킬 작정이었지만, 프랑스의 유럽 헤게모니 장악을 두려워한 영미놈들이 말려서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초래했다. 현재 프랑스는 핵보유국이며 미국 다음으로 군사대국을 뽑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다. 현대에 전투기고 뭐고간에 육해군 모조리 자체 생산으로 커버할 수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프랑스를 비롯하여 몇 없다. [[독빠]]들이 물고 빠는 독일도 이건 못한다. 즉 현대 유럽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인 전면전이 가능한 나라가 프랑스이다. 영국과 독일이 경제위기로 군비를 급격하게 줄이고 있어서, 당장 러시아랑 틀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우크라이나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 러시아군이 밀고 오면 이에 대항할 제대로 된 육군이라고는 프랑스밖에 없다. 물론 전차 가동률이 50%대에 머물고 있긴 한데, 이는 타 유럽국처럼 돈이 없어서 전차를 놀리는게 아니고 직업군인의 인기가 떨어져 전차 탈 사람이 없어서 전차를 놀리고 있는 것뿐이다. 여담이지만 2013년 초 말리 내전 당시 프랑스가 말리에 개입한다고 하자 불까들이 "개랑스 지들이 아직도 강국인줄 아나 ㅋㅋ 디엔비엔푸 시즌2 찍나?" 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막상 프랑스가 말리 반군들을 처바르자 입을 싹 닫아버렸다. 말리 내전에 4천 명이나 투입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군사적,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이 식민지 놔준 이후 버로우 탄 것과는 대조적이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tock_new1&no=3219112&page=4&exception_mode=recommend 최근 국방기술품질원이 조사한 세계 국방과학기술 순위에서 무려 러시아를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물론 1위는 [[미국]]이다. 댓글들도 한번 읽어보자. [[독빠]]들이 X을 뿌려놓은 프랑스군의 실체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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