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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평가 == 뭔가 무능해 보여서 외왕내제마냥 제국으로 인정을 못 받았던 것처럼 알고 있는데 하수아비 국가였던 건 맞지만 의외로 해외에서는 제국으로 인정해주며 황제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물론 황제 대접만 해주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인 캐나다인 프레더릭 매켄지 등은 광무개혁의 성과를 적극 인정했다.(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456쪽. Frederic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62~63쪽) 지한파 구미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던 일제 고위 관리의 발언도 주목된다. 1900년 2월 1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외무대신에게 “무릇 상업상 당국(한국)의 지위는… 단순한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들어서는 데 이르러 한두 동양 국가들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세계적 경쟁 영역에 임하고 있다”고 기밀보고를 했다.(『일본공사관기록』 1900.2.19) 1904년 10월 29일에는 “한국의 무역은 해마다 다소 소장(消長)이 있지만 발달의 추세가 현저하다”는 보고도 했다.(이태진,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150쪽) 대한제국의 경제 성장은 각종 통계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 정부의 세출예산을 보면 대한제국은 창건 9년 만에 예산이 약 4.6배나 늘었다. 경제 규모가 그만큼 늘어났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이윤상,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표:1900년 전후의 세출예산 및 군사비 규모 증가 추세’) 1990년대 이후 러시아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드러난 대한제국 수출의 증가 상황도 참고할 만하다. 대한제국의 무역 총량은 1901년 1800만 엔을 상회했고, 1904년에 곱절이 되었으며, 1910년엔 6000만 엔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의 1910년도 수출액이 1901년에 비해 무려 5.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한국의 주요 무역 상대국은 일본·중국·러시아·미국·영국 등이었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513쪽) 오랜 세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통계의 책임을 맡았던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통계자료도 있다. 매디슨이 2012년 산출한 한·중·일 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를 보면 한국 경제는 늦어도 개항 훨씬 전인 1869년 이전에 저점을 통과했고, 대한제국기 전반에 걸쳐 고도성장이 진행됐다. 매디슨 통계에 따르면 1911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815달러로 아시아 4위에 올랐다. 1915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달해 미국 치하의 필리핀(875달러)과 네덜란드 치하의 인도네시아(866달러)도 뛰어넘어 ‘아시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나타났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60~1062쪽)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353&aid=0000028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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