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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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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 최초 사망자의 발생과 유언비어==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학생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가격하고 구타를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이 날, 광주시민 김경철(28세)이 사망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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