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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 ==== 호법전쟁이 흐지부지 끝난 후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 군벌이 세 팀으로 갈라져나갔는데, 이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장쭤린이 이들을 중재하려 했으나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화해 시도는 전부 파국으로 돌아갔고 안휘 군벌과 직예-봉천군벌 연합 간에 [[안직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직예-봉천군벌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5.4 운동 이후 광둥성으로 돌아온 [[쑨원]]과 [[장제스]]는 제2차 호법운동을 광둥 군벌 천중밍과 함께 펼쳤으나 쑨원이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다가 천중밍과 사이가 나빠져 영풍함 사건을 통해 쑨원을 축출했다. 한편 5.4 운동 이후의 분위기에 따라 창당된 [[중국 공산당]]과 당시 자주 일어나던 노동 운동들을 지켜보던 국민당 측에서는 소련에 커넥션을 시도하기도 한다. 1923년 북양정부에서 부정선거 사건이 일어나자 쑨원은 호법운동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손을 잡아 혁명을 이루려는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1925년 국민당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두 번에 걸쳐 광둥의 천중밍을 공격했으며 도중에 쑨원은 사망하고 장제스가 당권을 이어받았으며, 두 번의 원정이 성공하면서 국민당이 광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직예군벌과 봉천군벌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손봉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북양정부를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틈타 1926년 국민당이 북벌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1927년 3월 24일 난징에서 반외국인 폭동이 일어나면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논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결국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국민당이 공산당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우한 국민정부 대신 난징 국민정부가 새로 수립되었다. 이때 일본도 위기감을 느껴 산둥성에 군대를 보내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7월 13일 국공결렬이 일어나고 우한 국민정부가 장제스에 대한 공세에 들어간데다가 북양군벌까지 역습하자 장제스가 남방으로 패퇴했고 공직에서 하야했다. 얼마 후 우한과 난징 간 통합 협상이 진행되자 일본군도 철수했고 북벌도 중단되었다. 이후 상계 군벌의 탕성즈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간에 당계전쟁이 일어났고 국민당 특위가 승리하면서 탕성즈 세력이 몰락했다. 이 틈을 타 장제스가 복귀해 왕징웨이가 합작했고, 장제스가 국민당 공직에 복직되며 북벌이 재개되었다. 이 틈을 타 일본이 다시 중국의 지난을 침공해 점령하면서 침략 계획을 드러내고 있었고 장제스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했지만 일단은 북벌에 집중하기로 했다. 장제스는 베이징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동북 지방으로 물러난 장쭤린이 일본 관동군의 기차 폭파 사건으로 암살당하자 동북 지방의 실권자가 된 장쉐량이 국민당에 복종하기로 하면서 1928년 12월 29일 최종적으로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했다. 한편 여태껏 중국 국민당을 공격하면서 산에서 홀로 투쟁하던 [[마오쩌둥]]의 중공은 강서로 이동했고, 중국을 통일한 국민당은 내분이 일어나 장제스 한 명을 몰락시키기 위해 국민당 합류 군벌들을 모아 장제스에 대항하며 반장전쟁이 발발했다. 소련도 장쉐량의 중동로 회수 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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