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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당 독재 === 막상 전쟁이 휴전에 들어갔지만 그 고통은 상당히 심각해서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지 60년 가까이 되어갔지만 기존에 만연했던 신분제는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신분 확인이 문제가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 체제가 시작되어 미군에게 쪼꼬릿을 얻어먹으며 살아가는 등 그나마 최소한의 희망만 남겨두었다. ==== 사사오입 개헌 ==== [[1954년]]이 되고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이 열렸으며 전쟁으로 북한에 대한 감정이 최악임을 이용하고 천재적인 후보 공천으로 압승했다. 참고로 이때 자유당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중 한 명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이다. 자유당이 국회도 장악했겠다, 자기들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현재 대통령인 [[이승만]]도 평생 대통령을 해야만 했다고 판단, 이승만이 영원히 대통령을 할 수 있게 '초대 대통령 한정 무제한 출마'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리고 자유당 114석 빨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재적 의원의 2/3이 찬성하는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실패했다. 하지만 헬조선의 전통이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 였다. 자유당은 바로 어용 수학자를 고용해서 '135.3333...석 미만이면 개헌이 안 된다라니 이게 뭔 개소리냐! 이 세상에 135.3333...석이 어딨냐! 사람이 소수점으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이냐! .3333...은 사람이 아니니 반올림해서 135석 미만이어야만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딱! 135를 채웠으니 개헌도 가능한 것이다!'를 외쳤다. 그리고 이 논리를 최순주 국회의장에게 내밀어 '우리 이렇게 개헌하는 게 어떻겠나요~' 하며 후장을 핥아줬고, 민주국민당은 이게 뭔 개소리냐 하며 반발했지만 최순주도 자유당 편인 덕에 '거 그럴듯 하구만 기래~ 개헌안이 의결되었읍니다 땅땅땅!'을 외치며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들 반응은 의외로 난리가 나지 않고 그럭저럭이었는데, 당시가 1954년으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잇대는 모두 일제강점기를 겪고 체험했기에 민주주의 의식이 없었고 학력도 최악이었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것은 당대에 지식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확실한 건 이때부터 자유당이 선을 넘는다. 또한 민주국민당도 친일파 일색인데다 뚜렷한 정체성도 없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955년]]에 대대적인 개선에 들어가고 독립운동가 출신 [[신익희]]를 중심으로 하여 반자유당을 내세우는 새 정당 [[민주당(1955년)|민주당]]을 창당했다. ==== 제3대 대통령 선거 ==== [[1956년]]이 되고 대통령 선거가 또 다가오자 자유당의 목표는 출마권이 무제한으로 늘어난 이승만을 또 당선시키는 일이었다. 민주당도 철저한 준비로 신익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한때 농지개혁법을 이끌었던 [[조봉암]]의 [[진보당]]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했다. 자유당 vs 민주당 판국으로 보였던 선거에 이런 변수가 등장해버렸고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조봉암이 농지개혁법 때의 일로 지지기반을 만들어 민주당의 입지를 위협했고 하필 이때 [[신익희]]가 선거유세 중 병으로 죽으면서 상황은 더 꼬였다. 역시 막장 드라마도 현실은 못 이기는 모양이댜. 결국 민주당 지지 표는 민주당의 신익희 추모표로 들어가거나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돌아가 갈려버렸고 자유당은 무난하게 대선에서 우승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우승했다. 비록 선거에서 이겼지만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자유당을 매섭게 위협했기 때문에 자유당의 다음 처리대상은 조봉암이 되었다. ==== 진보당 사건 ==== 민주당에서는 신익희가 죽자 [[조병옥]]이 당대표가 되었고 개편된 체제로 [[1957년]]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장충단 집회를 열었으나 자유당의 어용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와해당했다. 하지만 3년 전과 다르게 1957년은 세대가 많이 바뀐 시기였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세대가 늘어나면서 자유당의 이런 횡포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늘었고 자유당의 예상과 다르게 민심이 민주당에 돌아갔다. [[1958년]]부터 이전 해의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과 함께 미국이 우주개발에 돈을 쏟아붇기 위해 미국의 원조경제가 차관 지원 경제로 전환되면서 대한민국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당연히 자유당 지지율도 떡락했다. 그런데 4대 총선에서도 진보당과 민주당이 자기들을 쳐바를 것이 쫄렸고 특히 조봉암이 거슬렸기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조지고 진보당도 강제 해산시켰다. 드디어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국민 수준이 늘어난 게 불안불안했지만 진보당 강제해산 두 스푼에 [[게리맨더링]] 한 컵을 타고 [[닭죽 사건|닭죽]] 부정선거 몇 스푼을 탄 끝에 또 이기긴 이겼다. 그런데 민주당이 또 치고올라왔다. ==== 신국가보안법 파동 ==== 막상 이겼는데 4년 전과 다르게 자유당 개샊끼를 외치는 학생들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서 [[이기붕]]이 장악한 자유당 놈들은 이 시츄에이숑이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문제는 [[1959년]]에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해 해결했다. 이제 자유당을 욕하면 바로 공짜로 물 마시러 끌려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완전히 통제하고 언론까지 장악했지만 자유당의 븅신들은 1절이란 것을 몰랐던 것 같다. ==== 3.15 부정선거 ==== [[1960년]]이 되며 4대 대선이 다가왔고 자유당은 또 런승만을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하필 [[1875년]]생이라 85세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리 무지한 국민들이라지만 대통령 나이가 저 정도면 슬슬 안 뽑으려고 한다는 걸 자유당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기 중 죽으면 부통령에게 권력이 넘어가는데 부통령이라도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단 이승만을 당선시키되 자유당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에 부딪치는데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내세워야만 자유당이 살 수 있지만 4년 전에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된 상태라서 이번에도 망할 게 뻔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는데 마침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죽으면서 후보는 이승만만 남았고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이승만 100% 확정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이다. 신익희도 대선 전에 갑자기 죽었지 조봉암은 사형당했지 거기에 조병옥도 느닷없이 죽어버리니 국민들이 자유당에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유당은 이제 헌법을 바꾸거나 악법을 만들거나 하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렸고 결국에는 부정선거를 저지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였다. 여기서 투표함 바꿔치기, 3~5인조 투표, 완장 감독관 배치 등 별의 별 괴상망측한 방법을 부정선거 하는 데 쏟아부었고 자유당은 '부정선거 좀 한다고 저 멍청한 개돼지 국민놈들이 난리가 나겠어? ㅋㅋㅋㅋㅋ'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 때가 1960년이었다. 이놈들이 횡포를 저지르던 1950년대와 다르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학생들이 투표권까지 얻은 어른이 되면서 부산과 마산 등을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다. ==== 4.19 혁명 ==== {{민주화운동}} 이승만 정권은 총과 칼을 학생들에게 내밀며 항쟁을 진압했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자유당은 대놓고 선을 넘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으로 반자유당 시위와 항쟁이 일어나며 [[4.19 혁명]]이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로만 진행되었으나 추후에 국민학생들과 대학 교수들, 일반 시민들까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의거를 벌였다. 결국 [[4월 26일]] 상황을 더 질질 끌기 싫었던 이승만이 하야 선언과 함께 [[내각책임제]] 실시, 선거 무효화를 알리며 항복했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를 몰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후 대한민국에는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빤쓰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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