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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 == {{사실}} {{사이다}} {{양파}} 진한부분은 그놈의 인성을 알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난중일기''' 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배 안의 모든 군사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의 허튼 짓을 차마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 1593년 5월 14일 원균이 송경락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사용하려 하였다,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 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않고 혼자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해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 1593년 5월 30일 ㄴ 줘봤자 바닷속에 쳐넣을거면서 왜 혼자 독식하려고 한건지가 의문이다. 팔아먹으려 했을거같긴 하다. 경상도 수사 원균이 웅천에 있는 적들이 감동포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며 함께 물리치자고 공문을 보내왔다. 흉계가 실로 가소로 왔다. - 1593년 6월 5일 ㄴ이부분 해설좀. ㄴ해설 : 새벽에 기습하자고 보낸건데 공문을 당일에 보냄. 원균말마따나 새벽에 출진을 한다치면 적의 주둔지에 도착하면 이미 해떠서 잠다깼을 시간인데 그시간에 기습하자고 헛소리해서 충무공이 할말을 잃으신듯하다 새벽 2시쯤 원 수사가 공문을 보내와 내일 적을 치자고 했다. '''원 수사의 시기와 흉모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화답은 하지 않고 단지 네 고을의 군량에 관해서만 알려 주었다. - 1593년 6월 10일 저녁에 경상수사의 군관 박치공이 찾아와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해주었지만 '''원 수사와 그의 군관들이 본래 헛소리를 잘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 1593년 8월 7일 우후(虞侯)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전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육지로 달아나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건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고 다만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1597년 7월 21일 '''징비록'''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일을 끝내고 공을 다투는 마당에 가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본래 원균은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했다. 그는 안팎의 인사들과 접촉이 많은 것을 기회로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순신은 애초부터 우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여러 번 청해서 부득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적을 물리친 공으로 치자면 내가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원균의 말을 듣자 조정의 공론은 두 갈래로 갈렸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원균의 편을 들어 이순신을 몹시 모함했다. … 원균은 한산에 부임하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 받던 부하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이영남이 지난번에 자기가 패하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다 하여 더욱 미워하는 등 지휘관답지 않은 통솔을 했다.''' 이로 인해 군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자자했으니, 이 싸움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이순신이 한산에 있을 때는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밤낮으로 모든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의논했을 뿐 아니라, 하졸이라도 의견을 말하고 싶은 자는 언제든 와서 군정(軍情)을 통하게 했었다. … 이 때문에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이와는 반대로 '''자기의 애첩과 이 당(堂) 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자연 부하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그는 술을 좋아해서 날마다 술에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공연한 형벌로 군사들을 못살게 했다. 그래서 병졸들은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고 수군거렸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나게 까네 시발 ㅋㅋㅋㅋㅋ 정유년(1597)에 들어서는 이순신 장군님께서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하옥당하는 고초를 겪고 나서는 원균을 존나 극혐하다 시피 하신다. 이때 원균을 대놓고 '''원'''이라 부르는데 한자 문화권에서 남을 성으로만 부르는건 요즘으로 치면 '''원가놈'''이라 부르는 멸칭이다. 심지어 '''원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에도 남을 성으로만 부르면 버릇없는 건 다르지 않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고는 고인을 언급하는 건 좋아하지 않으신 것인지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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