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헤이그 특사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사건의 경과== {{위백}} 1907년 5월 21일 전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평리원판사 이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주재 일본무역사무관은 이를 통감부에 통고하여 그들이 헤이그에서 한국독립을 위하여 활동할것이라고 전했다. 밀사들은 러시아 수도에서 전주러시아한국공사관서기관 이위종과 합류하고 제2회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지 열흘 후에 헤이그에 도착하였으나 외교권이 없다고 하여 회의에 참석할수 없었다. 밀사들은 평화회의각국위원에게 서면으로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것을 호소하고 회의에 참석할수 있도록 도와줄것을 부탁하였다.그리고 평화회의의장 및 러시아 수석위원인 넬리도프를 예방하여 회의참석을 부탁하려 했으나 넬리도프는 만나주지 않았다. 또 네덜란드 정부에서 위원이라고 통고하지 않은 자는 누구든 위원으로 대우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밀사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의 위원들과 네덜란드 외무대신을 모두 방문하여 재차 부탁했으나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밀사들은 언론에 호소하기로 하고 각국의 기자단을 모으고 기자회견을 가져 수시간동안 일본의 한국침략상황을 폭로하고 현지언론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 정부 고관대작들은 좆까쇼하고 안만나주고 기사감 찾고있던 기자들 불러모아서 여론전 시도함 며칠이 안되어 이 사건이 알려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크게 힐책하고 이 사건의 책임은 한국의 황제 스스로가 져야 할 것이며 이 행위는 일본에 대하여 공연히 적의를 표한 것으로서 협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며 고종에게 윽박질렀다. 이날 내각대신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2시간에 걸쳐 대책을 논의하였다. 대신들이 밀사사건을 추궁하는 동시에 그 책임은 황제에게 있다고 발언하자 고종은 40여년간 외세의 힘을 빌려 자리를 유지할 궁리만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과단성이 없어 척족과 관리들의 부패를 제어하지도 못하고 썩어빠진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도 단행하지 못하여 나라를 이지경까지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답게 자신은 이 사건에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대신들에게 사태수습책을 강구하도록 부탁하였다. 대신들은 사태가 매우 중대하여 대신들의 힘으로 될것이 아니라 황제가 스스로 이를 해결하야한다 하고 일본에 사죄할 방법을 아뢰는 등 고종의 결단적인 조치를 요청하였다. 이때 한국 내각은 거의 모두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 이를 알게된 일본이 빡치자 고종이 아몰랑 내가 시킨게 아니라 헤이그 애들이 문서위조한거양 이라며 군밤왕다운 태도로 일관 그러는 중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총리대신에게 타전하여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취할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하여 통보하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는 이토에게 답하여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기회로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는것을 목적으로 할것이며 이의 실천방법은 첫째 한국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할것, 둘째 한국정부의 행정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게 할것, 셋째 대신,차관 이하 중요관리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할 것등 이라 하였다. => 한창 한국 먹을각 재고있던 일본이 명분을 얻게됨 한편 헤이그에서는 이준이 밀사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분노로 수일간 굶다가 피를 토하고 절명하였다. 밀사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조야의 여론이 물끓는듯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내각을 힐책하였으며 또 일본외무대신 하야시가 내한한다는 전보를 들은 내각대신들은 일이 매우 중대함을 예상하고 연일 내각회의를 열었던 바 7월 16일 오후 2시에도 이완용 등이 내각회의를 열고 4시간동안 비밀히 협의한 결과 황제의 양위를 결행하는것이 시국수습에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고 하여 이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8시에 이완용이 입궐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이번에 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조야가 격분하여 장차 무슨 행동을 할른지 모른다고 협박하고 이러한 곤란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방책으로 1. 지난번 체결한 을사조약에 어새를 찍을것 2. 섭정을 둘것 3. 황제가 친히 일본으로 가서 덴노에게 사과할것 3건을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완용은 다시 그러면 일본정부의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하여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역시 거부하였다. 다음날 밤에 대신일동이 입궐하여 다시 양위를 청하였으나 황제가 격노하여 그대로 퇴출하였다. => 대신들이 '님 그럼 책임안짐?' 이라고 하자 군밤왕답게 응 안질거야 라는 태도로 일관함 다음날(7월 18일) 오후 2시에 내각대신들이 다시 회의를 가진 후 오후 4시에 대신일동이 일제히 입궐하여 황제에게 사태수습책의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통감의 의견을 들어보겠다 하고 5시에 이토 히로부미를 불렀다. 황제가 이토에게 헤이그 밀사사건을 변명하는 동시에 내각대신들이 주청한 양위건에 대하여 통감의 의견을 묻자 이토는 한국황실의 중대문제에 자기가 간섭할 수 없으며 또 자기는 양위문제에 대하여 한국대신들과 상의한 일이 전혀 없다고 대답한 후 6시에 퇴출하였다. 양계초에 따르면 이때 고종의 말이 매우 애처로웠다고 한다. 7시에는 일본외무대신 하야시가 입경하여 즉시 황제를 보고 물러나온 바 이완용 등은 8시경부터 다시 황제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니 황제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동시에 대신들에게 일본의 요구를 끝까지 방어할 수단을 강구하라고 했다.그러나 대신들은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시국이 매우 절박하게 되었다 하고 갖은 협박을 다하여 양위를 주장하였다. 매천야록에서는 이때 이완용이 칼을 빼들고 '폐하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고함치자 고종을 모시는 무감과 액례들이 흥분하여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듯 가만히 앉아있었다고 한다. => 빡친 일본 외무대신이 '양위하시죠 폐하 ㅎㅎ?' 라고 하자 역시 군밤왕답게 싫다는 태도로 일관 황제는 그러면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자하고 밤 11시에 신기선 민영휘 민영소 등을 불러 의견을 묻는데 그중 민영휘와 민영소 역시 친일파였다.원로들이 수시간동안 토의한 끝에 양위 이외에는 일본의 추궁을 피할 방법이 없음을 상주하므로 황제는 할 수 없이 새벽 1시에 내각대신들의 요청을 하락하고 새벽 3시에 황태자대리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이때에 대신들은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것으로서 조칙을 내릴것을 주장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하는것으로써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이는 후일에 황제가 군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려는 것이었다. => 일말의 권력이라도 남겨놓고자 꼼수부림 앞서 일본외무대신 하야시가 밀사사건에 대한 처리를 위하여 내한하게 되자 항간에는 혹은 황제가 사죄를 위하여 도일하리라는 설, 혹은 황제가 양위하리라는 설, 혹은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리라는 설 등이 널리 유포 되었으므로 이 날 아침부터 시국의 위급함을 인식한 서울시민들이 소동하기 시작하였던 바 동우회 에서는 이날 회원 천여명이 특별회의를 열고 윤이병을 회장으로 선출한 후 일본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한 민중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종로로 몰려갔다. 이때에 종로에는 밤 9시경부터 많은 사람이 집합하여 있었으므로 윤이병이 종로에서 일반 군중에게 연설하고 군중과 함께 대한문 앞으로 몰려간 바 이 때에 궁궐의 수많은 일본순사와 군대가 포위하고 있었으며 또한 대한문 앞에는 내각대신들이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몰려든 많은 군중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함께 일본경찰과 충돌하였다. 한편 밤 11시에는 국사의 위급함을 우려한 서울시민 수만명이 모여들어 결사회를 조직하고 최원석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황제의 도일을 방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대표를 뽑아 7대신에게 보내었으나 일본순사에게 저지되었으며 또 만인소를 만들어 황제에게 굽히지 말 것을 청하려 하였으나 새벽에 일본순사와 헌병이 와서 총검으로 난타하여 거의 해산시켰다. => 빡친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일본 경찰병력들에게 해산당함 한국정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헤이그 특사 3인에게 중벌을 내렸으므로 이상설과 이위종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게 이 사건을 트집으로 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하였고 고종은 결국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참고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저 高宗時代史6집 진짜 씨발 세종이 와도 될까말까한 구한말에 고종같이 권력욕만 더럽게 쎄고 능력이라고는 없는 왕이 재위하고 있었으니... 에휴 씨발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