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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일본은 과거 일본 제국 시대부터 신중한 외교를 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임오군란 당시의 이토가 주도하던 외무부는 군부가 좌지우지하던 1940년까지 신중한 노선을 취했으며, 만주사변 이후에는 관동군의 침략질을 무마하느라 개고생한다. 또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주요5개국 중 하나로 굵직한 전후처리조약에 빠짐없이 참가했었던 일본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문민내각이 미국과의 전쟁을 끝까지 피해볼라고 했으나, 돌팍 도조 히데키가 군사내각을 열게 되고, 미국에 선전포고 후 패전하게 되며, 미국의 임시통치를 받게 되면서 그 외교적 위상이 밑바닥으로 추락한 바가 있다. 심지어 국제연맹을 대체하여 새로이 조직된 국제연합(UN)의 법에서 명기하고 있는 적국조항의 대상이 되는 굴욕까지도 겪었다.<ref>이 조항은 현재까지도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되었다.</ref> 이러한 충격적인 외교적인 입지에 놓이게 된 일본이 국격의 제고를 위해 자본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밀착노선을 채택한 것은 옵션에서 택한 선택이 아닌 필수선택지를 취한 것이었을수도 있다. 당시 미국 또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 진원지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이러한 양국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양국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52년 미군정이 열도에서 철수한후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지 23년만인 1956년에 UN으로 복귀에 성공한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하자 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 또한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소련은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대국인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 소련은 공식적으로 양국간 전쟁상태를 끝냄과 동시에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남쿠릴 4개섬 중 2개섬을 반환하고 영유권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제안을 두고 일본 내에서 남쿠릴 2개섬으로 만족하고 영유권 종식을 끝내자는 의견과 남쿠릴 4개섬을 다 돌려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일본과 소련이 가까워지는걸 경계한 미국의 압력이 영향을 미쳐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진행형 문제로 남게 된다. 자유중국과 공산중국 문제 또한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며 대만과 일방적으로 단교해버리고 중국과 수교하자 일본도 미국 뒤따라서 공산중국을 유일한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미국 응딩이 쫓아다니는 일련의 모습을 국제사회에 내비치면서 당시 제2,3세계 국가들과 데탕트주의 국가들로부터 미국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2중대 포지션을 취함으로 인해 일본이 냉전상황 하의 심각한 방위비 부담을 미국에 전가시키고 경제성장에 집중하여 상당한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을 위협할 수준이 되자 일본이 외교면에서 의존하던 미국이 오히려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서부터 일본 외교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아시아 방면의 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한 일본의 언론을 이를 두고 '탈구입아'로 표현하였다. 일본은 제1세계 일변도의 외교노선을 어느정도 탈피하고 데탕트 세력들과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강화에 힘쓰게 되었는데, 일례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일본을 무려 40회나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인해 강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면에서는 강대국들로부터 여전히 공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는 일본이 외국에 행사할 수 있는 두가지 주요 외교수단 중 하나인 군사력의 해외파병을 스스로 막은 탓이 크다. 1990년 걸프전쟁 당시 일본은 연합군 측에 재정원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경제대국이 병력을 전혀 안보내냐는 비난만 사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계에서 자위대의 해외활동 확대안이 심도깊게 다루어졌고, 결국 헌법의 선을 넘지않는 한도내의 자위대의 해외활동(UN평화유지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90년대에 일본은 경제패권국 지위를 노리는 위치에까지 올라 미국과의 외교적 대립이 한층 더 가열되었으나 90년대 중반 일본이 버블경제가 꺼지고 침체국면을 맞은 반면, 미국은 IT호황으로 날아오름에 따라 다시금 미국의 패권국 지위가 공고화되었고 미일관계는 21세기에 들어 코이즈미 정권과 미국 부시 정권에 의한 신 밀월관계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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