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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대첩 == {{전쟁 정보 |분쟁 = 독도 대첩 |전체 = |설명 = |날짜 = [[1952년]]-[[1965년]] |장소 =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결과 = 대한민국의 대승리 |이유 = 왜구의 준동 |교전국1 = {{국기나라|대한민국}} |교전국2 = {{국기나라|일본}} |지휘관1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승만]] |지휘관2 = {{국기그림|일본}} [[히로히토|히로히토 일왕]]<br />{{국기그림|일본}} [[요시다 시게루]]<br />{{국기그림|일본}} [[몽키 D. 루피]] |병력1 = 6척 이상의 경비정 |병력2 = 다수의 해적선 |사상자1 = 숫자 불명 |사상자2 = 328척 나포<br />3,929명 체포<br />44명 전사 }} 6.25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2년 1월,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선포한다. 하지만 국제법상 허용되는 3해리의 영해가 아닌, 자그마치 60해리를 영해로 선포해버린다. 이때 미국도 어안이 벙벙해서 1달 후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쿨하게 미국의 답변을 씹어버린다. 당연히 일본은 개지랄을 했지만 주권이 없었기에 공식 대응은 못했다. 그러다가 1952년 4월 일본은 주권을 되찾고 본격적으로 대응에 나섰는데 당시 한국과 미국 모두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몰래몰래 독도에서 조업을 허가했다. 덩달아 일본은 독도에 몰래 상륙해 일본에서 사용하는 독도 주소인 島根縣隱岐郡竹島(시네마현 오키군 다케시마)가 써져있는 저급한 표지판을 단 뒤, 미국 공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어부들을 위한 추모비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무리수를 둔다. 개빡친 이승만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닥치는 대로 나포하라고 지시해서 침략자 4,000명을 구금했다. 이 포로들은 좆본과의 협상 카드로도 잘 쓰였다. 해역 침범에는 강경책이 답이라는 걸 알려주는 좋은 사례. 이후 일본인은 돌려보냈지만 일본 선박은 우리가 가졌다. 오히려 이 선박에 기관포를 달아서 일본 선박을 나포하는 해경정으로 사용했다. 나포된 인질들이 풀려날 때도 "나는 주권국가가 선포한 평화선을 무단으로 침범했습니다."라는 문서에 서명을 해야 풀려날 수 있었고 서명을 거부할 시 서명할 때까지 고문을 했다고 한다. {{youtube|KJAMiagvyLs}} 이후 평화선은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 명분이 되었고 평화선을 넘어오는 순시선 및 어선들에게 닥치는 대로 발포할 수 있었다. 일본과 일뽕들은 이걸 가지고 "빼애애애액!!! 무단 점령 아니냐!!!"라고 주장하지만 어쩔 거냐? 이미 우리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데. 요즘 일본의 노예를 자청하려는 노예 새끼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승만 센세께서 친히 내려와서 일본을 대하는 유일하고 옳게 된 방법에 대해서 특강을 해주셔야 할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참고로 서해 같은 경우 짱깨들도 해역 침범을 하여 나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삽질로]] 인해 망명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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