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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에 관한 충격적인 진실 == {{진실}} {{쓰레기 상황}} 다만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닌게 백제 근왕 정예군의 당나라군 요격은 실패하지만 당나라도 사비성 어택땅만 찍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직 지방에 여러 백제 멀티는 남아있던 상태였고, 특히 백제 군사요충지인 웅진성이 있었다. 웅진성은 백제가 고구려한테 한강 몽촌토성 뺐기고 도망칠 때 만든 멀티라 방어용으로는 존나 쩌는 성이었다. 다만 방어용으로만 좋은성이라 나중에 좀 더 확장성이 좋은 사비성으로 옮겼던 거다. 그래도 일단 방어용으론 좋았고, 사비성이랑은 강으로 연결되어있어 존나 빠른 멀티가 가능했기에 꾸준하게 관리는 해왔다. 그리고 나중에 백제부흥운동을 하는 흑치상지나 복신 같은 지방군도 있었기에 군사적 역량도 아직 충분했다. 그랬기에 웅진으로 몽진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우주방어 존버하면서 시간끌고 지방군을 집결해 신라쪽의 보급은 막으면서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당나라 원정군은 짤짤이로 괴롭히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당시 백제는 왕실이랑 지방귀족세력이랑 존나 사이가 나쁘긴 했는데 했는데 아무리 의자왕이 싫어도 적국 신라에게 모가지 굽히고 5두품으로 강등되서 들어갈 귀족들이 있었을까? 무왕 이전에 백제왕들이 귀족들한테 털린 이유가 한성백제 시절 고구려한테 털리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돌아와서 귀족세력이 세진 것 처럼, 의자왕이 수도랑 왕실군이 털리고 힘빠졌으니 귀족들이 힘 모아서 당나라만 몰아내면 귀족들이 다시 정권장악하는건 불보듯 뻔한 건데, 그 상황에서 군사력 유지하고 항복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백제는 조선시대처럼 중앙집권화가 된 동네가 아니다. 거기다 고구려도 아직 망하기 전이니 SOS쳐서 고구려와 연합해서 당나라군 요격해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입장에서도 당태종 이후에 계속적으로 당나라에게 압박을 받고 있는데, 당나라 정예원정군을 백제랑 연합해서 홈그라운드에서 전멸시키면 당나라가 한 동안은 국외원정 할 여력이 안될 테니 자기네들도 한시름 놓을 존나 좋은 기회라 호응 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데 의자왕은 웅진성에 들어간지 5일만에 갑자기 항복한다. 나당연합군은 아직 웅진성의 끄트머리조차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서렌을 친것이다. [https://www.fmkorea.com/best/1761993547 예식진]이라는 새끼가 있다. 614년에 태어나 672년에 죽었으며,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고 낙양에서 발굴된 묘비에 당당히 적혀있으며, 백제 웅천, 즉 충남 공주 출신의 인물이였다.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예식이라는 자가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되어 있고, 의자왕보다 예식이 우선시 되어 주어로 써져 있었다. 즉 예식 = [[예식진]]이라는건데, 그럼 백제 장군 예식이 어떻게 당나라의 고위직 예식진이 된걸까? [[파일:다운로1드 (3).png]] 묘비에 보면 흉노출신이였으나 한나라에 항복해 큰 공을 세운 김알제보다도 예식진의 공이 더 크다고 서술되어 있다. [[파일:다운1로드 (4).png]] 민족 사학자 [[신채호]]는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이리 서술하였다. 누가봐도 웅진의 수성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사로잡아 항복시키려 하자 의자왕이 자살하려고 한 장면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파일:다운로1드 (6).png]] 그리고 또 다른 역사서를 해석하면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이란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의 뜻은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을 했다." 즉 예식이라는 백제판 [[이완용]]이 그나마 장기전으로 끌고가려던 의자왕을 배신하고 붙잡아 나당연합군에 넘겼고, 그렇게 백제는 허무하게 멸망해버렸다. 이 매국노짓거리로 인해 고구려까지 나당연합군에 털리는 엄청난 나비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참고로 학계에선 2010년까지 이 썰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예씨 집안 무덤이 더 발굴되고 나니 예식진의 손자 예인수가 묘비에 대놓고 우리 할아버지가 의자왕 통수치고 그 댓가로 당나라에 상받음 이라고 적혀있어서 이 썰은 정설이 되었다. 예인수가 그 내용을 대체 왜 썼는지 의문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예식진은 빼도박도 못하는 이완용과 동급 그 이상의 매국노가 되고 만다. 원래 당나라 시대 묘비는 곽철용이 처럼 나는 어떻게 잘나갔는가? 부터 우리집안은 뭘 했고 얼마나 쩌는 집안인가? 를 쓰는게 국룰이었다. 덕분에 당나라 시절 묘비만 가지고도 역사사료가 나온다. 연개소문 집안 족보도 매국노인 연남생 후손이 우리집은 원래 고구려 누구누구 때 부터 잘나갔는데 연남생때 당나라로 라인을 잘 갈아탄 덕분에 당나라에서 잘나갔다 어쩌고 써논 덕분에 역사적으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론 예식진의 매국노 짓거리에다가 당나라군 뒤치기 한방에 당해서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서 죽는다. 뭐 결과적으로 신라가 당나라 끌어들인건 못막긴 했으니 백제의 멸망은 그의 책임때문이라고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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