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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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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오와리 지역<ref>현 아이치 현의 서부지역</ref> 의 다이묘로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남미녀를 많이 배출했다던 오다가문답게 급식시절부터 미남소리를 많이 들었다.그의 친여동생 오다 오이치 역시 당시 최고의 미녀중 한명이였으며 그녀의 키는 무려168 당시 본인 또래들보다 거의머리2개 정도 더 있단거다........ 노부나가 역시 장신이였는데 170정도로 지금와선 호빗이지만 당시 남자평균키가155정도 였으니 현대인 기준으론 185정도ㄷㄷ 거기에 굉장히 총명했고 지혜로웠다고 오다가문은 키나 외모나 내력이나 빠짐없이 훌륭했나보다 잘생기고 키크고 똑똑하고 심지어 금수저ㄹㅇ 사기캐;; 후계자로 내정되 2살 때부터 나고야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당주가 되기 전까지 기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하며 이에 오와리의 바보라 불렸다. 1548년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정략결혼을 하였다.<ref>사이토 도산은 노히메에게 노부나가가 정말로 오와리의 바보라면 죽이라고 칼을 주었는데 노히메는 칼을 보고 저 칼로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다 한다. ㄷㄷ</ref> 1551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오다가는 적자인 노부나가를 지지하는 세력과 더 똑똑하다고 알려진 동생 노부유키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 가독을 둘러싼 전쟁은 노부나가의 승리로 끝나고 노부유키는 죽음을 맞이한다. 몇 년 안되어 스루가<ref>현 시즈오카 현의 동부지역</ref> 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속국 마츠다이라 가문과 함께 협공해오지만 전국시대 3대 전투인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따고 승리한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유능한 가신들과 다이묘를 잃은 이마가와 가는 급격하게 쇠락했고<ref>하지만 여전히 오다 가보다 강하였다. 근데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는 비옥한 농토지대라 오와리 1국만으로도 스루가-도토우미-미카와 3국을 차지한 이마가와 가문과 거의 생산력이 맞먹었다. 오케하자마 전투 당시 오다 가문이 이마가와 가문에게 현저하게 후달렸던 건 오와리 통일전쟁을 막 끝낸 참이거나 심지어 진행 중인 상황(이건 학자들간 견해가 갈린다. 대중매체에선 보통 통일한 직후에 오케하자마 전투가 벌어진 걸로 묘사함)에서 스루가-도토우미를 오랜 기간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미카와 역시 수년 전에 장악하여 힘을 길러온 이마가와와 붙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오다 공략은 굉장히 적절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케하자마에서 목이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와리를 쳐먹고 순식간에 국력을 두 배로 부풀려서 파오후가 될 수 있었을 거다.</ref>, 속국이였던 마츠다이라 가는 독립하여 오다 가와 동맹을 맺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장인어른인 사이토 도산이 그의 적자인 사이토 요시타츠의 반란으로 죽자 미노를 침공한다. 그러나 요시타츠도 만만찮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별 재미를 못보고 심지어 요시타츠가 죽으니까 그 아들인 다쓰오키와도 수년간 지겹게 전쟁하다 간신히 미노를 합병하는데 성공한다.<ref>함락 후 사이토 가의 거성이었던 이나바야마 성을 '''기후 성'''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다.</ref> 이 때부터 그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 새긴 도장을 사용하였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ref>검호쇼군으로 유명한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ref> 를 지지하며 교토로 상경,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킨 미요시 삼인중과 그들이 옹립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몰아내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한다. 교토로 상경 할 때 아자이 가의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와 자신의 동생 오이치를 정략결혼으로 결혼시킨 후 동맹을 맺었다. 노부나가는 교토에서의 지배력을 다지기 위해 비와호 부근에 아즈치성을 축성하고 자신의 본거지를 기후성에서 아즈치로 옮긴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에치젠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자신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근방의 강력한 다이묘들에게 노부나가를 치라는 공문을 보내었고 동맹이였던 아자이 가마저 배신하면서 '[[노부나가 포위망]]'이 만들어진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노부나가는 가네가사키 퇴로 혹은 퇴각이라 불리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 간신히 빠져나온다.<ref>이 때 신가리를 맡은 키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해내었고 오다 가의 중심이 된다.</ref> 간신히 빠져나온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전열을 정비하였고 아네가와 전투(1570년)에서 승리하였고 1573년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를 멸문시킨다.<ref>멸문시킨 후 잔치를 벌일 때 그들의 해골을 도금하여 만든 술잔으로 부장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고 한다.</ref> 1573년은 다사다난 한 해였는데, 위의 아자이&아사쿠라 가문의 멸문도 있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의 핵심 세력인 다케다 가의 다이묘 다케다 신겐이 사망한다. 이에 다 죽어가던 도쿠가와 가<ref>마츠다이라 가문이 1566년 미카와 지방을 통일하면서 조정에 미카와노카미라는 관직을 받고 도쿠가와로 개성한다.</ref> 는 다케다가 물러나면서 간신히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다케다 신겐의 죽음은 2년간 비밀에 부쳐졌지만 결국 들어나게되며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가 대패하게 되며 멸망한다. 또한 1575년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마저 사망하자 포위망은 유명무실해졌고 1570년부터 약 10년간 잇코슈과 혼간지를 줘패면서 항복을 받아낸다.<ref>이 사이 가장 유명한 사건이 1571년 히에이산 엔랴쿠지 방화사건이다.</ref> 이후 서쪽으론 하시바 히데요시를, 동쪽으론 시바타 가츠이에를, 동남쪽으론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보내 통일을 노리고 있었다.<ref>가네가사키 전투에서의 키노시타 히데요시이다. 그 전투에서 승리 후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에서 羽를, 시바타에서 柴를 따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개성하였다.</ref> 노부나가 본인도 시코쿠의 패자인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치기 위해 군사를 모았으며 출병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6월 2일, 적은 혼노지에 있다!( 敵は 本能寺に あり!)<ref>에도 시대 유명 문인인 라이 산요의 시의 구절 중 하나로 미츠히데가 진짜로 한 말은 아니지만 워낙 유명해서...</ref> [[파일:혼노지의 변.gif|350픽셀]] 주군,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하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배신한 것이였다. 적은 수의 호위 밖에 없던 노부나가는 불타는 혼노지에서 자결하였다.<ref>이를 [[혼노지의 변]]이라 한다.</ref> 미츠히데는 이후 바로 적자 노부타다도 공격해 죽였고<ref>노부타다는 사실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안 튀고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다 죽었다. 용감하다면 용감한 행동이긴 한데 그 후 오다 가문이 가주인 노부나가도 정통성있는 후계자 노부타다도 잃어 내분으로 좆망한 걸 생각하면 참...</ref> 오다 가문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일본의 통일이라는 대국적인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이를 대국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대국적인 부하에게 대국적인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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