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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기 전에 == 과거 3공화국 시절까지 학계에선 손자병법을 쓴 손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지금 손자병법의 저자가 사실 손무가 아니다! 라고 말하면 독서량 부족한 문맹취급 당하겠지만 당시엔 꽤 유명한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손자가 둘이기 때문. 한 명은 본문의 손무(현대에서 손자라고 하면 99.9% 손무를 말한다.) 다른 한 명은 [[손빈]]. 그 이유는 1972년에야 손빈병법이 발굴됐기 때문인데, 1. 실체도 명확하고 여러가지 유명한 일화와 라이벌 대결구도가 임펙트 쩌는 손빈. 저서로 손빈병법이 있다고 했으나 전하지 않음. 2. 실체도 모호하고 전하는 일화도 단 하나뿐인 손무. 그가 썼다고 알려진 병서가 있긴 하나 손"무"병법이 아니라 손"자"병법임. 3. 둘 다 손자라고 불림. 감이 오지 않는가? 사람들은 손무와 손빈이 둘 다 뛰어난 전략가인건 인정하되, "손자"는 둘 중 한 명이고 "손자"의 일화가 분할되어 두 명의 분량이 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기준으로 꽤 논리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은작산 한묘에서 손빈병법과 손자병법이 따로 발굴되면서 위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 춘추시대라는 배경과 손무 === 손자의 최대 업적은 춘추시대를 끝내고 전국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완벽하겐 아니어도 전국시대의 개념을 제시하고 도입하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손자가 지휘한 오나라가 당시 최강국 초나라를 박살내고 춘추5패에 등극한거만 봐도 손무의 유능함을 알 수 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전차전(轉車戰)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땅크가 아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궁병이나 창병이 타고 다니는 전차를 말한다. 여러 마리 말들과 수레를 끄는 일은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고 보관이나 유지보수에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전차로 전투를 진행하는 것은 귀족들이었다.<ref>게다가 전차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제후국을 일컫는 천승지국(千乘之國)이란 단어를 보면 잉? 고작 천대? 할 수 있겠지만 사마법(司馬法)에 따르면 전차 1승에 갑사 3명이 타고 전차를 호위하는 보병 72명, 이런저런 보조부대 25명 도합 100명이 전차 1대를 운용했다. 즉 전차 1000대 = 10만명이다.</ref> 전차들이 수백 대 이상씩 엉겨붙어서 싸우니까 전장은 반드시 평야여야 했다. 또 전쟁을 귀족들이 하는 만큼 장군(將軍)이라는 용어나 개념도 없었고 전쟁이 터지면 문과 정치인을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신사적이고 매너 있게 싸웠다. 침공군은 방어군에게 전투 일시와 장소를 정해서 통보하는 청전(請戰)을 하고 양측이 대열을 갖추고 나면 맞다이를 뜨는 치사(致師)를 한다. 싸우는 와중에도 군대가 와해되거나 지휘관이 잡히거나 본진의 깃발이 탈취당하거나 하면 승패가 갈렸다. 도망가는 자와 노인은 포로로 잡지 않았고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1:1 에이스 결정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타가 끝나고 승패가 갈리면 막사에 모여서 "우리가 졌습니다. 요구조건을 들어드리지요." "껄껄껄 좋은 승부였소."하고 전쟁을 끝냈다. 대부분 한타 한 번이 곧 전쟁 전체이다 보니 전략전술은 거의 없었고 개개인의 스텟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물론 아에 전략전술이 없던 것은 아니라 후퇴하다가 반격하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샌드위치 만들고 하는 간단한 움직임 정도는 있었다. 이런 춘추시대의 전쟁관을 깨부순 것은 손무가 지휘한 오나라였다. 오나라의 지배층은 주나라 문왕 서백의 후손으로 네임드 한족이었지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오랑캐라... 중원의 나라들과는 달랐다. 또 임시로 지휘관이 되는 경(卿)이나 대부(大夫)등의 귀족개념이 모자랐기 때문에 중원의 전략가들을 장군으로 임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초나라 출신의 오자서가 참모가 되고 제나라 출신의 손무가 장군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손무가 임명된 '장군'은 전쟁시에만 임명되는 지휘관이 아닌 항상 군대와 같이 생활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직업군인의 개념이었다. 이후엔 장군제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최초의 직업군인은 손무였다. 병기체제에서도 오나라는 달랐다. 오나라는 미개하기도 했고 습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전차를 운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전차를 도입하고 나라 사정에 맞게 개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력군은 보병대였다. 중원에서도 이미 독립적인 보병대가 조직되어 운용되긴 했으나 전차가 들어가지 못 하는 산악지대에서의 전투 등 제한적이고 전차를 보조하는 역할로만 사용되었을 뿐. 오나라처럼 주력으로 운용하진 않았다. 보병은 전차보다 유연하고 행동이 자유롭다. 전차가 가지 못 하는 산이나 늪과 같은 지형도 뚫고 갈 수 있다. 이런 보병의 장점은 복잡한 전략전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일례로 오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할 때 손무는 BC511년부터 BC506년까지 여러 부대를 초나라의 이곳저곳 깊숙이 침투시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펼쳤다. 초나라군은 그때마다 군대를 파견했지만 오나라군은 재빨리 빠졌기 때문에 초나라군은 긴장이 풀렸고 점점 지쳐갔다. BC506년 손무는 초나라군이 방심한 틈을 타 전군을 밀어붙였고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기고 초나라의 수도<ref>이하 영(郢)</ref>를 땄다. 이는 대전략을 세우고 실행한 최초의 전쟁이다. 승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전쟁은 기사도고 윤리고 다 내던진 채 속고 속이는 진흙탕 싸움이 됐다. 군사 업무만 처리하는 장군 체제, 언제든 동원 가능한 상비군, 기동성 좋은 보병과 기마병,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과감함. 이런 손무의 소양들은 후에 전국시대의 개념 그 자체가 된다. 어쨌든 이 초나라전으로 춘추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면 된다. 단 한명이 시대를 바꿔버림 크 손자 클라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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