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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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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아프간은 한때 왕정시절 친소련-비동맹 노선을 유지해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973년 자히르 샤 국왕이 해외순방 나간틈을 노려 사촌인 다우드 칸이 폭동을 일으켜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공화국을 설립한다. 뭐 소련 눈치 보면서 잘 사나 싶더니 갑자기 반공정책과 급진개혁을 추진하여 빨갱이와 개슬람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8년 4월 27일 아프간 군대 내의 사회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칸을 죽이고 정부를 엎었다. 빨갱이군부는 3일 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인민민주당 혁명위원장에게 권력을 넘겼다. 타라키는 넙죽 권력을 받아 혁명칙령 1호에 서명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사실 아프간 인민민주당은 문제가 조낸 많았다. 타라키의 칼크(대중)파와 바브라크 카르말의 파르참(깃발)파가 대립하고 있던 것. 타라키는 힘 빢 주고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엘리트 빨갱이가 되자고 주장했고 파르참은 천천히 산업화 해가면서 아프간식 사회주의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결국 쿠데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멍청이들은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그런데 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밖에서 막아보겠다고 사회주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여성 위주의 문맹타파 운동, 징병제 실시, 부족과 이슬람 소유 토지 몰수, 신부 지참금 금지, 혼인 자유등을 선포했다. 솔직히 지금 보면 괜찮은 것도 있긴 한데 그놈의 공산주의 땜시 망했다. 실제로 각지에서 종교 및 문화 탄압이 있었다고 대도시는 그래도 군대와 소련의 고문단이 있으니까 뭐 그럭저럭 나아갔는데 부족제가 강한 깡촌에선 반발이 어마어마했다. 타라키는 쫄렸는지 개혁에 반대하는 정치범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여 수용소에 가뒀다. 수용소에 사람 들어갈 자리가 없자 정치범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공포정치에 반발한 지방 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유명한 부족이라면 파슈툰 족(탈레반의 주류)이라던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반정부 세력의 커멘드 센터가 되자 쿠데타의 근본인 군부가 동요했다. 병사들이 수 천명이나 탈영했다. 이렇게 1978년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3월달에 더욱 격해졌다. 헤라트에서 반정부 시위가 있었는데 진압을 맡은 17사단이 반란을 일으켜서 소련 고문단과 가족들을 싹 다 죽여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정부는 보복으로 전투기를 출격시켜서 헤라트에 폭탄을 퍼부었다. 사망자는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7사단의 반란으로 소련은 아프간의 상태가 영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프간에서 공산주의보다 큰 세력이 있다고 결론지었는데 다들 예상하다시피 이는 이슬람 세력이었다. 소련은 알렉세이 코시긴에게 타라킨과 통화하라고 시켰다. 코시긴 :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가? 타라킨 : 그러길 바랍네다. 코시긴 : 장난깜? 소련에서 훈련받은 아프간 장교들은 다 뭐함? 타라킨 : 그놈들이 죄다 이슬람 반동분자들입네다 동무. 그러면서도 우즈벡이나 타지키스탄 출신 병사들을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파병해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 생김새나 문화권이 비슷하니까. 코시긴은 제안을 거절하면서 국제적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지좀 말라고 쪼인트를 깠다. 우리는 여기서 코시긴이 이슬람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새로운 세력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련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미 원조와 군사고문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여기서 지상군을 파병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다. 이때 미국도 아프간 문제에 대해서 고민중이었다. CIA는 아프간에 개입하자! 개입! 했지만 막상 개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층부에선 미국이 아프간에 개입했다가 소련이 빡치면 그대로 세계 3차대전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여기에 이미 소련이 지상군을 파병할 것이라고 궁예질을 해 둔 상태였기 때문. 그러나 CIA는 어떻게든 개입하고 싶었다. 당시 CIA는 온갖 비윤리적인 공작들이 들켜서 예산과 인원감축을 당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아프간이었고 아프간 개입의 베이스캠프로는 대미관계가 극악이었던 파키스탄이 낙점됐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였는데 카터는 인권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행위를 싫어했기 때문에 관계가 나빴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8년 전 인도와의 전쟁에서 완패했고 든든한 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국과 소련이 대처방안을 놓고 시간을 쓰는 사이 아프간에선 시위대라면 어린이와 청소년까지 죽이는 강경진압이 대세였다. 이런 강경진압은 대도시를 지킬 순 있었으나 지방을 지킬 수는 없었다. 아프간 산악지는 무자헤딘의 본거지가 됐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각 반군과 정부군에게 총기와 장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망해가는 타라키 정부를 지키려고 개혁과 국정운영에 손을 댔지만 타라키는 그냥 답이 없었고 결국 소련은 KGB요원들을 파견하여 대사관을 지키게 하기에 이르렀다. 타라키가 이토록 답이 없었고 소련의 말도 잘안듣고 우리식 노선건설 이지랄하면서 소련의 정책 및 명령에 반발하는 낌새가 보이자 개빡친 소련은 같은 당의 같은 파벌인 하피줄라 아민을 새로운 아프간의 지도자로 찍었다. 9월에 소련에 갔다온 타라키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아민파와 KGB요원들에게 체포당해 얼마 뒤 처형당했다. 그런데 아민도 답이 없었다. 아민은 집권하자마자 아프간 정부의 해외 계좌에 손을 댔다. 아프간 현지의 KGB요원들은 그런 아민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실 아민은 미국이 심은 CIA요원이다"라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그런데 이 정보가 돌고 돌아 소련 본국의 KGB본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KGB본부는 그 소문을 자신이 퍼트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그 정보를 믿어버렸다. 게다가 아민이 개인적으로 미국 대사를 다섯 번이나 만나자 소련의 의심은 끝판에 달해 아민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망상은 점점 심해져 KGB의장이라는 인간은 "CIA의 아민 포섭은 미국이 차례대로 소련 남부의 이슬람 국가들을 연결해 "뉴 그레이트 오스만 제국"을 만들려는 음모"라고 주장했다. 막상 아민을 만났던 미국 대사는 "아민놈은 미국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했고 대화는 생산성이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ㅄ 11월 26일 소련 상층부는 아프간을 침공하기로 결론지었다. 12월 7일 권력투쟁에 밀려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했던 바브라크 카르말이 아민의 후임으로 낙점되어 KGB요원들과 함께 카불 인근의 바그람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직후 KGB는 아민 암살에 돌입했다. 먹는 음식에 독을 탔으나 아민은 독살을 우려하여 수십 명의 시식자를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토를 한 것을 빼고는 모두 멀쩡했다. 다음 날 저격수가 아민을 저격했으나 빗나갔다. 이후 작전은 그냥 지상군 투입 때 관사에 쳐들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12월 중순이 되자 소련군이 아프간 국경으로 집결했다.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카불 공항엔 수송기들이 착륙했고 40군은 전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가는 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360사단은 침공 당일에 카불에 도착했다. 아민은 끝까지 소련을 믿었다. 아프간 정보부가 소련이 침공해서 네 모가지를 썰 것이라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아민은 서방제국주의의 음모라고 무시했다. 오히려 자신이 요청한 파병이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생각해 파티까지 열었다. KGB는 이 때도 독살을 시도했으나 아민은 죽지 않았다. 아민이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KGB와 스페츠나츠 병력이 타지베크 궁을 공격했다. 아민은 궁궐을 지키던 경비중대가 학살당하는 와중에도 소련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하며 소련군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아민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본 사람이 없으나 총상을 입고 죽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이슬람 세력인 무자헤딘이 카르말 정권을 소련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던 것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이들을 진압할 지원군을 요청한다. 처음엔 거절했으나 친소정부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개입을 했다. 소련은 이 군사개입이 몇 달만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생각보다 무자헤딘의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전쟁은 진척이 없었다. 븅신들이 존나 높은 산동네에 탱크랑 장갑차 끌고가면 뭐 어케 공산화가 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당시 소련군은 걍 유럽에서 나토새끼들하고 기갑웨이브 펼칠 생각하던지라 편제 자체가 대부분 기계화 or 공수 편제였다. 참고로 기갑은 사람 수 상관없이 그냥 탱크 1대가 1개 분대인지라 이걸 일반보병으로 바꾼들 병력이 그리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 보병은 10명이 1개 분대인데 탱크 하나 털어봤자 4명밖에 안 나온다. 완전 반토막이다. 소련군의 침공 뒤 카르말 정부는 정통성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 죄수들을 석방하고 이슬람을 국교로 인정하고 국기를 이슬람식으로 수정했다. 여기에 천부인권까지 선포했다. 그러나 부족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은 여전했고 정부 내부의 권력투쟁도 여전했다. 즉 소련군이 카르말의 해답이 되진 못 했다. 1980년 2월에 카불에서 반소 폭동이 일어났는데 아프간군은 이들을 진압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징병제로 인해 과도하게 징집된 병력들은 탈영하기 바빴고 충성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결국 소련군은 직접 땅끄를 끌고 폭동을 진압하여 약 30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자헤딘에 가담했다. 소련 상층부는 정보기관 육성에 주력하고 아프간군의 통제권을 가져와 직접 작전을 지시했는데 소련에 의해 강제로 전쟁터로 내몰린 아프간군은 탈영했다. 아프간군은 소련 침공 5개월만에 9만명에서 3만명이 돼 있었다. 그럼 탈주한 병력이 어디로 가는가? 무자헤딘이 됐다. 1980년 봄 소련은 카불까지 가는 도로만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모든 땅은 무자헤딘의 영토가 됐다. 결국 소련군은 아프간 정부군을 빼고 직접 게릴라 소탕에 나섰다. 게릴라라 함은 물자를 대는 빽이 없으면 얼마 못 가기 마련인데 마수드나 빈라덴같은 게릴라들에게 돈과 무기를 댄 초대형 세력이 있었다. 앞서 말했던 CIA, 그리고 사우디였다. CIA는 소련을 격퇴한다거나 아프간의 이슬람화를 막는다던가 하는 거창한 목표는 일단 버리고 소련의 전쟁비용을 늘리는데에 주력했다. CIA가 직접 개입할 경우 이런저런 위험성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파키스탄을 통했다. CIA는 RPG로켓과 영국제 리엔필드 소총을 사서 파키스탄에 하역해서 알아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파키스탄은 여러 이해관계가 물려 지원을 도왔다. CIA가 지원한 리엔필드 소총은 30년이 넘은 구식 무기였지만 무자헤딘들은 상상 이상의 전과를 뽑았다. 소련군의 최신식 병기와 압도적 화력은 불시에 치고 빠지는 게릴라들에게 상대가 안 됐다. 1981년 미국의 대통령이 레이건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무자헤딘을 마구 도와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레이건이 무자헤딘 주요인사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정의의 용사'''라며 전세계에 소개했다. 니미 레이건 병신쇄끼. 레이건 저 빙신쇄끼 때문에 밑에 써 있는 결말:미국-아프간 전쟁 이 일어난 것이다. 레이건은 옹호했지만 그 다음 미국 대통령부터는 버렸기 때문에 무자헤딘의 입장에서 보면 토사구팽이다. 1981년 동안 아프간 전쟁에서 입은 소련의 피해를 보고받은 미국은 레이건의 의지에 의해 1982년 아프간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렸다. 1983년엔 아프간전의 가성비가 기막히게 훌륭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전쟁비용 뿐 아니라 소련은 국제적인 입지까지 잃었다. 사우디는 한참 전부터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아프간에 공을 들일 때부터 중동에까지 야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데 인근의 국가들이 공산화된다면 친미국가인 사우디는 사방이 포위당해 고립될 뿐 아니라 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우디가 소련하고 친하게 지내서 중립외교를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우디는 이슬람 국가라 원래 국민정서가 공산주의인 소련을 싫어하는데 그 소련이 같은 이슬람 국가인 아프간을 침공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도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사우디의 왕자 투르키 총정보국장은 이에 대한 출구로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부터 사우디는 아프간 전쟁을 이슬람 전쟁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그 첫 번째 발판은 현금이었다. 1980년 7월 사우디는 비밀리에 미국이 아프간에 얼마를 쓰던 간에 같은 금액을 지원한다는 조약까지 맺었다. 이와 별개로 돈 많은 석유재벌들이 모금을 하기도 했고. 사우디의 돈과 이슬람 신도들이 결합하여 아프간에 뛰어들었는데 이슬람 신도에 대해선 지금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슬람의 지하드를 시작한 사람은 압둘라 아잠이라는 인물이다. 아잠은 70년대부터 "지하드(투쟁)는 이슬람의 의무!"라고 주장한 지하드주의의 아버지인데 이 양반은 대학교수라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선동하곤 했다. 선동된 학생 중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있었다. 원래 지하드는 나 자신과의 싸움 (ex:금딸)을 일컫는 말인데 이때 아잠이 아프간 가서 소련과 싸우는게 지하드야! 하고 선동하고 이게 발전해서 지금의 지하드는 테러의 대명사가 됐다. 그런가하면 이슬람의 지하드를 이끈 사람은 모두가 아는 오사마 빈 라덴이다. 빈라덴은 파키스탄 접경지대에서 도로공사를 하면서 이름을 알렸는데 어라? 이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 사우디의 석유재벌들이 기부해준 돈이었다. 그럼 이 도로는? 돈과 무기를 수송하기 위한 도로였다. 빈라덴은 초창기엔 도로공사나 하는 청년CEO였고 전쟁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잠의 선동에 흑화되어 우연히 무자헤딘의 기지를 방문하게 되는데 때마침 소련 항공기의 공습이 시작됐다. 폭탄이 기지 안으로 떨어졌는데 우연히 빈라덴의 코앞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탄이었다. 게다가 공격에서 죽은 아랍인은 한 명도 없었다. 빈라덴은 이 사건이 신이 자신을 보호하는 증거로 여겨 본격적으로 흑화했다. 심지어는 참전자를 모집하는 기지까지 차렸다. 그러고서는 사람을 모집해온 사람, 지원자에겐 돈을 준다고 홍보하여 사람들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범죄자들도 이곳에 오기만 하면 사우디 정보국이 발행하는 위조 신분증과 빈라덴이 주는 돈을 받고 아프간전에 참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프간으로 간 무슬림들은 목표가 없었다. 무자헤딘이야 자기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싸운다지만 무슬림들은? 그냥 막연히 '순교' 하러 갔잖아?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전쟁이 끝나고 방황하던 이들은 알카에다가 된다. 1984년 소련은 스페츠나츠와 하인드 등의 헬기를 적극적으로 투입하면서 2년 안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강경안을 입안했다. 워싱턴에선 소련의 강경적인 움직임을 포착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아프간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바꿨다. "승리"로. 그러면서 CIA를 내치고 특별기구를 창설해 아프간에 대한 전략을 수립했고 국가안보정책결정지침(NSDD-166)을 통과시켜 미제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C4, 시한폭탄, 스팅어 등을 아낌없이 지급하면서 교관을 파견하여 테러캠프를 설립하고 폭탄 다루는 법, 사보타주, 스팅어, 저격총, 지뢰등을 교육했다. 이 테러캠프는 후일 알카에다 테러대학의 전신이 된다. 정확한 명칭은 테러리스트 기반 시설이다. 이렇게 교육한 엘리트 테러리스트들을 거느린 CIA가 위성사진으로 소련군 목표를 지정하면 무자헤딘들이 이를 공격하는 전술도 만들었다. 소련군은 야전에서는 스팅어에, 점령지에선 테러에 시달리게 됐다. 그렇게 전황이 다시 무자헤딘 쪽으로 기울었을 즈음... 무자헤딘 세력은 분열된다. 바로 이슬람 때문인데 중동 출신의 이슬람 전사들은 아프간의 전통 양식을 우상숭배라며 파괴하고 이슬람을 강요했다. 당연히 무자헤딘들은 반발했고 서로간의 살인도 일어났다. 각종 무기와 인력이 아프간으로 흘러들어가며 미국이 한창 낄낄대고 있을 때 소련은 철군을 계획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서기장 취임때부터 아프간전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판단했고 1986년 말엔 철군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아프간의 카르말에게 "네가 정권을 지키고 싶으면 네 힘으로 해라."하고 통보했다. 사실 천천히 상황 봐가면서 빼려고 했는데 문제는... 1986년 봄에 소련 본국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이젠 군비고 나발이고 더 쓸 돈이 없다. 당장 체르노빌부터 막아야지, 안 그러면 소련이라서가 아니라 인류 멸망하게 생겼다. 그래서 1987년부터 서서히 빼려고 했지만 빌어먹을 체르노빌 때문에 그렇게 안 하고 체르노빌부터 틀어막아야 하기에 철군명령을 1986년 그 해 안에 지시하려고 마음먹었다. 1988년 2월 고르바초프는 연설에서 아프간에서 철군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4월 아프간 정부와 협정을 맺고 병력을 뺐다. 여기엔 무자헤딘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당연히 무자헤딘들은 반발했고 무장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 포로고 나발이고 다 포기하고 그냥 무작정 빼고 차량도 고장이 많이 난 건 그냥 버렸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버려진 T시리즈(T-34, T-55 등)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소련이 철군하고 패배를 인정한 상황에서 아프간에 친서방 정권을 수립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소련이 아프간의 재건을 위해 지원한다면 우리도 비슷한 성격으로 CIA를 지원할게! 했을 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큰 리스크를 떠안고 싶지 않았겠지. 어쨌든 이렇게 싱겁게 소련-아프간전은 끝났다. 수많은 오갈 데 없는 무슬림들과 그 대장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황폐화된 아프간 영토를 남기고. 참고로 당시 미국,영국같은 서방국들은 무자헤딘에게 정보 및 무기를 지원했고 소련과 공산권 국가의 맹주 자리를 두고 대립한 중국마저도 무자헤딘을 지지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같은 경우는 베트남전에서 엿먹은 기억 때문에 대놓고 스팅어를 존나게 뿌렸다. 존나게. 러시아 사람들은 당시에 CIA 요원들과 짱깨들이 무자헤딘이랑 같이 실전에 투입되었다고 믿는다는데(제9중대같은 러시아 영화나 작품 등에서 간간히 나온다 이런 묘사가) 아마 진짜 그랬을거다. 대놓고 니새끼들도 베트남처럼 엿먹으라고 한거니까. 미국 게임 블랙옵스2에서도 대놓고 CIA와 짱깨가 소련군을 조지는 걸로 나온다. 무자헤딘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소련군은 집에 돌아가고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군비를 부담한 거대한 삽질 덕분에 소련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쫌 있다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터져서 소련이라는 나라는 정말 겉잡을 수 없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이야 거기서 몸성하고 잘 돌아간 미군들 중에 일부가 PTSD로 고통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련 아프간 전쟁만큼 심각하지도 않았고 미국은 이런 참전용사들에게 어떻게든 지원해주려고 노력했지만 소련은 아니었다. 그냥 병뚜껑(훈장) 하나 주고 끝이었다. 이렇다 보니 가난해서 먹고 살기 어려운 지경까지 간 참전용사들은 마약밀매에 손을 대고 그러다 보니 자기도 마약에 손을 대어 결국 인생이 망하게 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문란한 성생활까지 하는 바람에 에이즈에 걸리고 에이즈가 여기저기 전염되고 만다. 일부 소련 포로들은 소련에 가기 싫어해서 그대로 무자헤딘에 투항해서 무자헤딘군으로 싸우고 전쟁 끝난 뒤에도 계속 눌러살고 있는 놈들도 발견되었다. 어떤 병사는 1960년 생인데 1980년에 징집당해서 싸우다가 1981년에 무자헤딘에 포로로 잡혔는데 바로 항복해서 무자헤딘군으로 살다가 이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아프가니스탄에서 살고 현재도 살고 있다. 소련군 꼬라지도 죄다 [[노숙자]] 거지새끼 꼬라지였는데 차량을 존나 많이 갖고 있다는 것만 빼면 빼박 노숙자와 모든게 똑같았다. 그런데 소련군이 존나 개좆병신인게 산악지역인 아프가니스탄에 전쟁을 한답시고 죄 기갑 부대로만 편제를 짜는 바람에 차로 이동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산에 [[탱크]] 끌고 가는 미친 놈들이 이 새끼들이다. 탱크는 평지에서 싸우라고 만든거야, 이 병신들아. 당연히 게릴라 보병전을 고집하는 무자헤딘군에게 털릴만했다. 웃긴 건 한 전투에서 소련이 이겨서 무자헤딘 포로들을 잡아다 센타까보니 순 독일제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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