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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일제강점기]] ~ [[제1 공화국]]시기에 활동한 한국의 체육인이자 [[정치깡패]]. 본래 수기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숭일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서울 경신학교 3학년때 일제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하면서 학교를 중퇴했고 이후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수물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서울 중앙YMCA 체육관에 다니며 [[유도]], [[권투]], [[검도]], [[역도]]를 익힌 스포츠맨이 되었다. 1929년, [[광주 항일학생운동]]이 발발했을 때 이에 참여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뤘고 1930년 10월 출옥한 뒤 광주 숭일학교에 체육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강사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에 불법운영으로 면허가 털렸고 그는 자격증을 얻기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가 피똥을 싸는 노오력을 했다고 한다. 자격증을 취득한뒤엔 다시 고향에 내려가 1931년 기독교성향의 보이스카우트였던 소년척후대를 조직, 녹성상회 건물주<ref>광주 사직공원 방송국 입구에 있던 2층건물로 [[거북선]]표 고무신을 팔았으며 뒤편에는 체육관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당 건물의 2층은 광주 높으신분들의 사교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ref> 광주 YMCA 체육부 간사로도 활동했는데, 당시 광주의 유일한 조선인 유도사범이었다고 했던 것을 보면 엄청나게 잘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양동우회]]사건 + 흥업구락부 사건등으로 기독교, 우익계열 항일단체들이 개작살나면서 좆본에 투옥, 고문을 받은뒤 [[8.15 광복]]이전까지 광주 방림동에서 칩거했다. 광복이후 서울로 올라가 [[대한민청]]과 유사한 우익계열 정치깡패단체인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에서 활약했고 [[6.25 전쟁]]에서도 활약했다가 전후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간 뒤 광주YMCA가 금남로 1가에 지금의 회관을 재건하고 1971년 체육관을 설립하자 1981년 죽을 때까지 광주 YMCA의 체육관장으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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