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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공귀동과 풍룡동에서 민무늬토기, 흑도, 반달돌칼, 돌도끼, 청공과가 발견되었고 노남동에서 명도전이 나온거랑 강건너에 [[고구려]] 국내성이 있었고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털린뒤 수도를 옮긴 평양성(平襄城)이 여기로 추정된다는 것말고는 쓸거없다. [[발해]] 서경압록부 환주에 속했다가 발해멸망이후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말기 [[공민왕]]이 북진하면서 수복되었고 1361년 독로강만호를 설치하면서 [[평안도]]에 편입되었다. 136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만호부를 설치한다음 지방군으로 진변(鎭邊)ㆍ진성(鎭成)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사군(軍)을 두고 상부천호가 이군을 관리하게 했다. 1401년 입석(立石)과 등이언(等伊彦)을 스까해서 석주(石州)라 불렀다가 여진족 방어를 위한 군사요충지로 선정되어 1403년 강계부로 고쳐졌다. 1413년 각도의 단부(單府)를 도호부로 개칭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33년 5월에 판관을 두었다. 1442년 3월 도절제사영이 [[영변군]]에서 본군으로 옮겨졌다가 1446년 1월 원상복귀되었다. 1449년 5월과 1462년 7월 순으로 문,무반토관이 임명되었고 1453년 도절제사영이 혁파되었다. [[세조]]가 방어하기 힘들다고 꿀땅인 4군을 폐지하자 우예군과 자성군의 주민들을 강계로 강제이주시켰고 1457년 10월 익군을 파하고 [[초산군|이산]], [[위원군]], [[자성군]]을 포함하는 강계진을 두었다. 1555년 부사 박수린이 처음 도성을 쌓았고 강계진외에도 벌등진, 고산진, 만포진, 평남진, 신광진이 있었다. 1623년 판관이 없어지고 1692년 우방어사가 파견되서 강계도호부사는 강변우방어사를 겸하게 되었고 뒤에는 강변우방어사대신 청북우방어사와 강계진병마첨절제사가 추가되었다. [[병인양요]]시기 양헌수가 본군출신 포수 500명을 전쟁에 동원했고 1895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후창군, 자성군,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을 관할하는 강계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1년만에 23부제가 없어지고 13도제가 행해지자 강계군으로 바뀌어 [[평안북도]]에 속했다.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이후 [[희천군]]과 함께 다양한 천연자원이 개발되고 공장이 오지게 깔리면서 공업화되었고 강변이다보니 [[독립군]] vs [[좆본군]]의 주요 전장이 되곤했다. 해방직후 [[소련군정]]에서 [[자강도]]가 분리되자 자강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6.25 전쟁]]때 [[북괴군]]이 [[인천상륙작전]]이후 좆발리고 [[평양 탈환]]으로 평양까지 털리자 [[강계군]]의 지하에 임시수도를 두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도 강계에는 공격을 대비한 지하공장들과 지하 만리장성들이 많다고 한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을 하면서 시중군, 장강군, 전천군, 만포군, 용림군등 [[울산시]]정도만한크기의 군들로 공중분해되면서 면적이 많이 쪼그라들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안티테제인 [[부산광역시]]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지금은 [[혜산군]], [[무산군]]만큼은 아니지만 강변인데다 인구도 많아서 [[탈북]]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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