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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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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드립애매}} {{빛과어둠}} {{사기캐}} {{문무겸비}} {{이중적}} {{키큼}} ㄴ 190cm의 장신이었다. 오늘날의 2m 이상 수준이다. {{사회주의}} {{필요악}} {{깨시민}} {{호불호}} {{간지폭풍}} {{강철멘탈}} {{영웅}} {{애국지사}} 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 거품 논란이 많은 [[청산리 전투]]와 달리 홍범도 장군니뮤의 [[봉오동 전투]]는 명백한 갓한민국의 참교육이다.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이지만 평양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어 19세기 후반에는 호랑이 사냥꾼, 1890년대에는 종이 공장 노동자, 1900년대에는 광산 노동자를 하기도 하는 등 시대가 변할 때마다 별의별 직업을 거쳐왔다. [[경술국치]] 이전인 1895년부터 [[무산군]], [[갑산군]] 등 이북 국경 지대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가(을사의병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정미의병 때 재참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대에는 광산 노동자를 그만두고 만주, 연해주로 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다. 이상설이 창설한 권업회에도 참여했다. 1920년에 만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이끌면서 좆본군을 참교육 했는데 그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그런데 1927년 헬쏘오련 공산당에 입당을 했다가 러시아인의 인종차별을 겪고 고통을 받았고, 이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좆탈린]] 씹새끼의 강제 이주 때문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결국 거기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쭉 카자흐스탄에 유해가 있었으나 2020년 드디어 봉환이 결정됐다. 북괴는 홍범도 장군이 평양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발했으나(그럴 만도 한 게 이 사람은 이북~만주에서만 활동하던 사람이다.) 이 새끼들이 가져갔으면 김돼지의 우상화에나 써먹혔을 것이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유해가 고국으로 귀환했으며 2일의 국민 추모 기간 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5년 묘소 조사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유해 송환을 추진했지만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현지인 분들의 반대가 있었고, 북괴 새끼들의 견제로 인해 송환되지 못했다가 후손인 김알라 씨의 의사로 한국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이북 출신이고 소련 공산당에 소속되었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남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은 좀 좋지 않다. 정확히는 이북 사람은 먼지만큼도 관심 없다는 반응이다. 사실 소련 공산당에 입당을 해서 그렇지 만약 소련 공산당에 입당 안 했으면 아마 국부 취급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 당장 런승만도 원래 이북~만주에서만 활동하던 사람이니까. 몇몇 극우파들은 홍범도? 그 빨갱이! 하고 색깔론으로 까기도 한다. 정작 박정희는 남로당 경력 있고 백선엽은 박정희 남로당건을 변호했고 홍범도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대통령도 박정희였다. ㄴ 반론으로, 박정희는 어쨌거나 대한민국으로 전향한 인물이고 홍범도는 공산당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던 김좌진 장군과 고려인도 많이 있었다.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 소속이었던 건 맞지만, 북괴 창설과 불법 남침에 가담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한국전쟁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생겨난 냉전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생겼다. 그리고 홍범도가 말년을 보내던 1930~1940년대에는 추축국과 맞설 공동의 목표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원수가 아니라 엄연히 같은 연합국이었다. 현대에 와서 공산주의의 부작용과 실패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극악무도한 만행들을 생생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1920~30년대는 공산당을 무조건 나쁘게 볼 수만 없던 시대였다. 당시에는 여러 이념들은 난립하고 있었다. 당장 이때만 해도 민주주의라는 국가들은 모든 국민들에게 공정한 권리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여성 참정권이나 식민지인 차별 등), 자본주의는 대공황으로 체제 자체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 좌파 쪽도 공산주의 뿐 아니라 사민주의, 아나키즘 등의 여러 분파가 존재했다. 거기에 자유주의도 싫고, 공산주의도 싫으니까 파시즘, 나치즘이 그 대안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도 공산주의가 혁명으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을 핵심 강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과격하고 폭력적인 이념으로 평가를 받긴 했지만 모두가 개판이던 시절이라서 공산주의만 콕 집어서 뭐라고 할 수 없던 시대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김원봉과 다른 케이스다. 김원봉은 월북 이후 불법 남침을 계획한 전적이 있다. ==진실== {{진실}} {{극혐}} {{고인드립허용}} {{공산주의}} {{살인범}} {{재평가/거꾸로}} {{선역같은악역}} 괴롭히던 장교 살해후 도주 도망쳐서 일자리 얻었지만 거기서 고용주 살해후 도주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팔십원을 달래가지고 무달사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금품 갈취 후 살해.. 유채골 동리에 야밤에 달려들어 부자놈 아들놈 붙잡아다가 일화 이만팔천9백 여원을 빼앗아 군비에 쓴일이 있습니다. 일반인 상대로 강도짓 홍원군수 홍가 자를 붙을어 일화 37000원을 빼앗아 가지고.. 당장에 식구는 오늘밤으로 멸망시킨다 하고 일화 3십만원을 바치라 한즉.. 일반인 상대로 강도짓 및 살해 협박 이딴게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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